새로운 시작을 앞둔 너희들에게
‘프리지아’의 꽃말을 아니? ‘당신의 앞날을 응원합니다’야. 새로운 시작을 앞둔 너희들에게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꽃이 있을까. 통통한 꽃망울과 노란 얼굴, 달짝지근한 향이 천진한 아이를 떠올리게 하는 꽃이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엄마가 내게 안겨 주신 꽃도 바로 프리지아였어. 한껏 멋을 부린 채 프리지아 꽃다발을 들고 수줍게 웃고 있던 내 모습이 떠올라.
너희들의 웃음소리와 노래, 괴성과 고함으로 교실과 복도가 떠들썩하던 날들, 요즘 들어 부쩍 그때가 그리웠어. 수능 이후 너희가 없는 학교를 지키며 줄곧 졸업식을 상상해 왔지. 마지막 인사 앞에서 나는 담담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서 이렇게 편지를 써. 못다 한 이야기가 많아서 ‘졸업 축하해’라는 말만으로는 너희를 보낼 수 없는 내 마음을 알아주렴.
최근에 허태준의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라는 책을 읽었어. 작가는 부산기계공고 3학년 시절 현장 실습생으로 공장 생활을 시작해서 졸업 뒤 산업기능요원으로 복무를 마칠 때까지 4년 가까이 노동자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야. 수능과 무관한 또래의 삶, 일하는 청소년의 일상을 상상해본 적 있니? 사실 난 특성화 고등학교 학생에 대해서는 딱히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어. 전해 듣는 이야기만으로 섣불리 판단하고 막연한 두려움마저 가지고 있었지. 그런데 이 책에 이런 구절이 있더라.
수험생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라는 광고 문구는, 거리 가득한 축제 분위기에서 자꾸만 우리를 소외시키는 것 같았다. 입시를 준비하지 않았던 열아홉의 나는 수고하지 않았던 걸까? … 열아홉 할인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공장에서 일하던 나에게. … 어쩌면 학교를 다니지 않고 어른이 되어야 했던 누군가에게도 이 거리가 조금은 더 따뜻하고 위로가 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동안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만 근무하면서, 대학 입시는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겪는 통과 의례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 ‘대부분’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게으른 것이었는지 비로소 알게 됐지. 너무나 많은 이를 ‘보통’의 범주 바깥으로 손쉽게 밀어내 버렸으니까. 학교가 아닌 공장에서, 입시 대신 취업을 준비하며 치열한 시간을 보내는 10대들의 존재를, 그리고 그들이 느끼는 사회적 소외감을 난 미처 상상하지 못하고 살았던 거야.
철학자 니체가 말한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호의’도 결국 상상력이 필요한 일 아닐까.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 것, 다르고 낯선 존재를 마음속으로 그려보고 헤아리려는 노력이 선의의 바탕이 될 테니까. 게으른 무지가 오해를 양산하고, 오해가 혐오가 되는 건 한순간이란다.
노인의 몸과 마음이 어떨지 짐작해 보렴. 엄마가, 엄마가 되기 이전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 상상해보렴. 여러 소수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 보렴. 부지런히 서로를 상상하며, 세계에 대한 민감성을 잃지 말고 살아가자. 갈 길이 멀다, 얘들아.
지난주엔 오랜만에 극장에서 영화 한 편을 봤어. ‘소울’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였지. 주인공 ‘조’에게 재즈 음악이란 삶의 목적이자 의미야.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우상 ‘도로시아’와 함께 꿈에 그리던 무대에 서게 된 날, 무사히 공연을 마치고 내려온 그는 도로시아에게 이렇게 물었어.
“그 다음은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냥 매일 이렇게 무대에 서는 거야.”
왠지 모를 허탈감과 공허함을 느끼는 조에게 도로시아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어.
한 어린 물고기가 늙은 물고기에게 헤엄쳐 가서 물었지.
“바다를 찾고 있어요. 어디로 가면 되나요?”
늙은 물고기는 대답했어.
“이곳이 바다란다.”
“여기는 그냥 물이잖아요.”
어쩌면 우리도 바다에서 바다를 찾아 헤매고 있었는지도 몰라. 영화가 말해주듯, 맛있는 피자 한 조각, 바람에 날려온 단풍나무 씨앗 하나, 따뜻한 햇볕과 거리의 기타 연주,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실타래 등이 우리의 바다를 이루고 있는 거지. 간절히 원했던 것이 반복되는 일상이 되어 버린 순간, 오히려 조는 무심코 지나치던 일상의 소중함을 깨달았어. 생각해 보렴. 학교생활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지던 날에도 분명 눈부신 순간이 있었을 테니까.
영화가 끝난 뒤 노래 한 곡이 흘러나왔는데, 가수 이적의 ‘쉼표’라는 곡이었어.
난 이제 높다란 나무 밑 벤치 위에 앉아 하늘만 바라봐요
말없이 한참을 안아 줄 이토록 따뜻한 햇볕 아래
꿈꾼다는 건 좋은 거라 그렇게 얘기들 하죠
하지만 부디 잠깐만 날 내버려 둬 줘요
내버려 두지 못해 미안했다, 얘들아. 그동안 내가 너희들에게 꿈꾸기를 강요해 왔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꿈을 실현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삶만이 의미 있는 것처럼 말이야. 먼 바다를 찾으려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단다. 우린 이미 바다에 있고, 대단한 성취만이 우리가 사는 목적은 아니니까. 현재의 삶을 확고하게 지탱해 주는 작은 것들을 더욱 사랑하렴.
영화에서 수많은 어린 영혼들이 지구에서의 삶을 시작하기 위해 지구로 뛰어드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어. 이제 세상으로 뛰어드는 너희의 모습이 포개져서 마음 한구석이 아릿하기도 했지. 살아갈 준비가 되었다면, 살아볼 용기가 생겼다면 한 번 부딪쳐 보렴. 나는 또 다른 아이들과 이곳에 머물겠지만,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을 결코 잊지 않을게. 너희의 모든 하루를 응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