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교육에 대한 단상
“하우 얼 유? 아임 파인, 땡큐, 앤쥬?” 내 인생의 영어는 이 문장들로 시작했다. 물음과 대답이 야무지게 덩어리져서 마치 하나의 문장처럼 느껴졌다. 어떤 대체도 불허하는 조합이랄까. 영어를 말이 아니라 글로 배웠던 시절, 알파벳 대소문자를 중학교 입학 과제로 처음 접했다. 일명 ‘빽빽이’를 통해 지겹게도 외워댔던 단어들. 쪽지 시험은 또 얼마나 숱하게 치렀던가.『맨투맨 기초 영어』,『성문 기본 영문법』같은 고전들을 끼고 다니며 영어 문장 파헤치기에 골몰했던 그때, 영어는 새로운 언어라기보다는 교과목 중 하나일 뿐이었다.
글은 읽어도 말은 못하는 이상한 언어 교육 속에서 중․고등학교 6년을 보냈다. 영어와 관련 없는 학과로 대학을 진학했으나, ‘실용영어’라는 필수교양과목이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나 전혀 실용적이진 못했지만. 용케 토익, 토플 따위 한 번도 치르지 않은 채 직장인이 됐고, 영어와의 인연은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대학도 무사히 들어갔고, 학점도 잘 받았어. 이제 그만, 바이바이.
이후 본의 아니게 영어와 재회한 것은 아이 때문이었다. 산부인과에서 하는 태교 수업에 갔더니 강의 주제가 ‘우리 아이 영어 실력, 뱃속에서 결정된다’였다. ‘이중 언어’, ‘모국어 습득 방식’, ‘영어 뇌’ 같은 단어들이 쉴 새 없이 쏟아졌고, 예비 엄마들은 메모까지 해가며 귀를 기울였다. 영어동요나 동화 CD를 노상 틀어놓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듯했으나 영어로 태담을 하라는 말에는 급격히 자신감이 떨어졌다. 확실히 알게 됐던 건, 고의성과 주의력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행하는 ‘학습’과 무의식적이고 직관적인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배우는 ‘습득’의 차이점이었다. 그래, 나는 영어를 철저히 ‘학습’했던 거였어.
신혼여행지인 하와이에서 주유소를 ‘오일뱅크’라고 말하는 바람에 렌트카 업체 직원에게 폭소를 선사하고, 스카이다이빙 낙하산 비행 중에 등 뒤의 교관에게 할 수 있었던 말이라고는 ‘원터풀’, ‘그뤠잇’이 전부였던 내게, 모국어 수준으로 영어를 구사하는 건 꿈의 경지였다. 만약 내 아이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아, 이게 바로 대리만족인 거군요.
변명을 하자면, 상상을 실제로 만들기엔 사는 게 너무 바빴다. 막달까지 일했고, 낳고 보니 현실 육아의 치열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먹이고 똥 치우고 재우며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다, 도망치듯 일터로 복귀했다. 0~3세가 영어 귀 뚫리는 적기라는데, ‘특별한 아기를 위한 현명한 엄마의 선택’은 바쁜 일상 속에서 유야무야 묻혀 버렸다. 아이에게 ‘학습’ 대신 ‘습득’의 길을 열어주고 싶었으나, 능력 밖의 일임을 인정해야 했다. 안 듣고 못 봤다면 몰랐을 것들이 알고도 넘어가는 바람에 부러 죄책감만 자아냈을 뿐.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영어 공부 안 하는 또래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지방에다 소위 학군 좋은 동네도 아닌데 그랬다. 어학원, 교습학원, 방문 교육, 학교 방과 후 수업 등 경로는 다양했지만, 많든 적든 아이들의 시간은 공통적으로 영어에 매여 있었다. 일주일 내내 딸아이를 어학원에 보내고 있는 친구가 말했다. “에이, 걱정 마. 좀 더 있다 해도 돼. 저학년이라 놀면서 어르면서 하다 보니 별로 배우는 것도 없는 것 같더라고. 아직은 효율성이 좀 떨어진달까. 유치원 때 친구들이 다 가니까 저도 가는 거야. 시간도 좀 때우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불안감은 사라지진 않았다. 그래도 수년 간 주워들은 풍월이 있을 텐데, 뭐가 달라도 다르지 않을까. 아이가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대로 손 놓고 있어도 괜찮은 걸까. 영어 과목이 정규 교육과정에 편성돼 있는 게 초등학교 3학년부터이니 좀 더 기다려보자 싶으면서도, 돌아서면 또 헷갈렸다. 조기 교육 안 하려다가 적기마저 놓치는 건 아닐까, 뒤쳐져 있다는 인식이 성취감이나 자존감을 해하진 않을까 하는 걱정들. 해도 고민, 안 해도 고민이니 다들 일단 시작하고 보는 것일지도. 그 편이 덜 불안하니까.
한글도 학교 입학을 몇 달 앞두고서야 시작해 이제 좀 한시름 놓을 만 하니, 다음 관문은 영어인 모양이었다. 어째 등 떠밀려 참가한 레이스에 허겁지겁 남들 뒤따르기만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이의 의사를 존중하고 남과 비교하지 않으며 장기전에 임하는 마음으로 서두르지 않겠다던 다짐은 자주 시험대에 올랐다. 엄마표 영어에 탁월한 ‘능력맘’들이 온갖 매체를 통해 앞다퉈 비법을 전수하는 통에 사교육뿐 아니라 홈스쿨링에도 적극적이지 못한 나 같은 엄마는 한층 더 기가 죽곤 했다.
‘처음에는 물에서 오래 버티기 기록만을 측정하다가 점점 모두가 웬만한 수준에 이르자 평가 방식은 수영 기법으로, 잠수로, 다이빙으로 진화한다. 굳이 그렇게까지 수영을 잘할 필요가 있냐고 생각하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해서 얻은 평판, 이를테면 “쟤는 잠수도 못하는 사람이야.”, “물장구가 어설퍼 보이는데 과연 일을 잘하겠어?”라는 식의 수군댐이 개인을 평생 괴롭힌다면 입장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평생 잠수할 일 없어도 수영 잘 가르치는 학원을 찾고 본토의 다이빙 자세를 전수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어느 정도의 성과를 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물에 뜰 줄만 아는 사람을 향해 자신처럼 노력하지 않은 사람이라면서 평생 무시한다.’
사회학자 오찬호가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이라는 책에서 대한민국 교육 시스템의 현주소를 수영에 빗대어 표현했다. 몇 년 전부터 초등학생 대상 생존수영 교육이 의무화됐는데, 이를 염두에 둔 웃픈 비유다. 적절한 수준에 익숙해지면 세상을 살아가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을, 누가 ‘더’ 잘하는지 가리려다 보니 배움의 본질에서 멀어지고 불필요한 경쟁만 양산하는 꼴이 된다는 거다. ‘본토의 다이빙 자세’라니…. 진짜로 저렇게 되는 건 아니겠지.
2018학년도 수능부터 영어 영역은 절대평가제로 전환했다. 꼭 ‘더’ 잘하지 않아도 일정 성취기준에 도달하면 ‘누구나’ 1등급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학습 부담을 경감시키고 영어 사교육을 억제하며 학교 영어교육을 정상화시키고자 한 취지였으나, 돌아가는 꼴이 그렇지가 않다. 엄마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이런 말이 나온다. 영어는 초등학교 때 마스터해야 한다, 중․고등학교 때는 변별력 있는 여타 과목에 매진해야 하므로. 이러니 영어 조기교육 시장이 더욱 문전성시를 이룰 수밖에.
‘학습’이 아니라 ‘습득’을 위한 것이라면 뇌가 활발히 형성되는 유년기에 언어를 배우는 게 유리하긴 할 테다. 세계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수단이자 경쟁력으로써 영어 실력이 중요한 것도 십분 동의하는 바이다. 다만 태중의 아이마저 타깃 삼아 온 나라가 영어 교육으로 수선스러운 통에 종종 신물이 날 뿐이다. 그럼에도 주저리주저리 한 마디 보태는 까닭은 신경이 쓰여서다. 불안해서다. 시험기간에 공부 하나도 안 하면서 남몰래 초조해하는 쫄보 게으름뱅이처럼. 남들이 뭘 하든 꿋꿋이 마이웨이를 고집할 위인은 못 되므로.
아이가 “나 영어 공부 해야겠어. 학원 보내줘.”라고 자발성을 발휘할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줄 자신은 없다. 그런 일은 영영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약빠르게 동기를 부여하거나 보상으로 구슬려 조만간 영어 사교육에도 뛰어들게 되겠지. 늦어도 3학년이 될 즈음해서는. 사교육 없이 영어에 능통한 아이들의 사례는 대부분 ‘그럴 만한’ 여건이 배후에 있다. 외국에 살다 온 경험이 있거나 부모의 영어 실력이 뛰어나거나 아이를 전담마크할 보호자가 있거나. 배후는 생략하고 부모의 노력만을 강조하는 기만적인 노하우들 좀 그만 전시했으면 좋겠다. 적어도 여기서 더 불안해지지는 않게.
이왕지사 ‘습득’은 물 건너간 ‘학습’의 길일지라도 아이가 저 스스로 공부의 이유 정도는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효율성으로 따지자면 본인의 필요에 의해 주체적으로 노력하는 케이스가 최고일 테니까. 그게 그저 대학을 잘 가기 위한 도구적 기능을 띨 뿐일지라도. 하지만 적어도 내가 학창시절에 경험한 것보다야 진일보한 형태의 학습을 경험할 수 있기를. ‘실용’을 표방한 영어 교육을 평생에 걸쳐 안팎으로 실시하는데 그 결과는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요즘 아이들은 “하우 얼 유?”라는 질문에 얼마나 다양한 대답을 떠올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