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들이 으레 하는 말이 있다. 드라마에서도 심심찮게 나오는 대사,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뱃속에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제일 먼저 떠올린 말이기도 했다. 죽어도 이 말만은 하지 않으리. 부모 스스로 자식의 족쇄임을 자처하는 말, 효도를 강요하는 구차한 말이라 여기던 터였다. 기쁘고 설레기보다 비장한 출발이었다.
그 즈음 인기를 끌던 TV 프로그램 중에 『비정상회담』이라는 게 있었는데, 한국에 거주 중인 다양한 국적의 청년들이 특정 안건을 놓고 토론을 펼치는 구성이라 재미가 쏠쏠했다. 부모 자식 관계에 대한 나라별 인식 차이가 대화의 주제였는데, 벨기에 국적의 패널이 했던 말이 인상적이었다. “한국 부모들은 특히 자식에 대한 소유욕이 강한 것 같아요. 부모 자식은 소유가 아니라 인연으로 맺어진 관계잖아요. 부모님은 늘 저에게 ‘널 만나서 반가웠다’라고 말씀하셨어요.” 불러가는 배를 어루만지며 다짐했다. 나도 꼭 그렇게 말해줘야지. ‘내가 낳고 키운 내 새끼’와 ‘반가운 인연으로 만난 특별한 존재’ 사이에는 엄연한 간극이 있어 보였다.
아이를 낳고도 바깥일에 여념이 없는 사이, 육아와 살림을 도맡아주신 어머님 덕에 별 어려움 없이 엄마 행세를 하고 살았다. 그러다 학교 입학을 몇 달 앞둔 어느 날, 아이의 유치원 선생님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친구들 대부분이 한글을 읽어내는 걸 보면서 아이가 요 근래 종종 시무룩해 있었다는 것. 한글 교육의 주책임자는 매일 등·하원을 도맡아 하는 할머니도, 부모라는 범주에 함께 속해 있는 아빠도 아니었다. 선생은 콕 집어 엄마인 나에게 책임을 묻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그래도 명색이 국어 교사인데 자식한테 한글 하나 못 가르치겠냐던 자신감과 책을 통해 아이 스스로 한글을 깨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는 한순간에 조급함으로 바뀌었다. 북유럽 국가들이 취학 전 문자 교육을 금지하는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며 조기 문자 교육을 대차게 비판하고 싶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아이가 아직 한글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보다 친구들과 자신을 비교해 주눅 둔 모습이 더 걱정스러웠다. 고작 나이 일곱에 한글 속성 교육이 웬 말이냐 싶으면서도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초단기 한글 완성’ 학습지였다. 주 1회 10분 남짓의 방문 관리가 기본인 학습지는 엄마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수였고, 과제를 해내기 위해 아이와 씨름하는 동안 나는 자주 언성을 높였다.
그렇게 발을 들인 사교육 시장은 정말이지 또 다른 세계였다. 아이가 한글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게 되자 미련 없이 학습지를 그만뒀는데, 그 정도는 맛보기에 불과했다. 입학 후 3월 한 달 간 하교 시간 교문 앞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아이를 데리러온 학부모를 대상으로 각종 학원 및 학습지를 홍보하려는 이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두 손 가득 받아온 홍보물을 찬찬히 살펴보니 공부방, 어학원, 피아노, 미술, 줄넘기, 수영, 태권도, 한자, 독서 논술, 코딩, 사고력 수학 등등 사교육의 영역이 과연 어디까지인가 싶을 정도였다. 피아노는 소근육 발달을 통한 두뇌 개발을, 미술은 저학년들의 학교 수업 적응과 창의력 및 집중력 향상을, 태권도는 체력이 곧 학습력임을 강조했다. 예체능 교육 자체를 목적에 두기보다 학습력 향상을 위한 도구적 기능을 부각하는 문구들이 꽤 보였다. 그래야 더 많은 부모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으리라는 듯이.
어쩌다보니 우리 아이도 현재 음미체 학원 세군 데를 다니고 있다. 홍보 문구에 현혹된 건 아니라고, 아이가 원해서 시작한 거라고 은근히 점잔을 빼며 매월 50만원에 육박하는 사교육비를 기꺼이 지불하는 중이다. 그러면서도 학습 분야의 사교육이 빠져 있다는 불안감을 상쇄하고자 독해와 받아쓰기, 계산법 문제집 등을 사들였다. 호기롭게도 이른바 ‘엄마표 수업’을 계획한 셈. 어쩐지 ‘만남’이 아니라 ‘키움’의 영역에 깊숙이 발을 들인 느낌. 그보다 더 찝찝한 것은 이 정도의 투자가 평균 정도밖에 안 되는 현실과 아이 교육의 책임이 오롯이 엄마인 나에게만 지워진 작금의 상황이다. ‘그래도 엄마가 교사인데….’ 하는 선입견이 날이 갈수록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주위를 둘러봐도 직업 유무와 관계없이 자녀 교육의 책임은 대부분 엄마들이 지고 있었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라는 말을 으레 엄마들이 하는 것도 자녀 양육 및 교육의 주체가 주로 엄마기 때문 아니겠는가. 휴직 중 놀이터에서 알게 된 엄마들 가운데 전업주부인 이들이 나름의 고충을 토로했다. 그들은 자녀 교육의 책임에서 워킹맘보다 더더욱 자유롭지 못했다. ‘집에서 노는 사람이 애 교육 하나 제대로 못 시켰냐!’는 질책을 들을까봐 두렵다고도 했다. 휴직도 불가능하고 조부모의 도움을 기대하기도 어려워 할 수 없이 퇴사를 선택한 후 집안일을 도맡게 됐는데, 그 때문에 아이를 잘 키워야 할 책임이 더욱 무거워진 셈이었다. 워킹맘보다야 더 잘 해내야 하지 않겠냐는 압박감은 자녀 교육에의 매진으로 이어졌다. 늘어나는 사교육비를 감당하기 위해 재취업을 하려 해도 경단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고, 시간제 업무 등을 통해 번 돈은 고스란히 자녀 교육비로 들어갔다. 직업적 성공과 자기계발을 포기하고 자식 키우는 데 오랜 시간 애쓴 엄마들의 입에서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라는 말이 나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과열된 사교육 시장과 피 튀기는 교육 경쟁을 엄마들의 탓으로 돌리는 사회적 시선과 종종 마주한다. 나 역시도 극성 엄마들을 종종 비난의 대상으로 삼았다. ‘욕망덩어리 엄마들 때문에 애들만 죽어나는 거지.’라고 하면서. 반면 아이의 삶에 적당히 ―‘적당히’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모르겠지만―개입하지 않는 엄마들에게는 그것대로 또 무책임하다는 비난이 쏟아진다. 나 또한 ‘엄마가 국어 선생인데 애한테 여태 한글 안 가르치고 뭐했냐’는 핀잔을 받았듯이. 어쩌면 엄마들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지 않으면 쏟아질 비난들이 두려웠던 게 아닐까. 한국 사회에서 모성을 들먹이며 추켜세우거나 깎아내리는 건 일도 아니니까. 자식을 소유물처럼 여기고 치열하게 키울 수밖에 없는 한국의 엄마들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게 아닐는지.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서 딸아이를 서울의대에 보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려 했던 진짜 극성 엄마도, 실은 딸의 입시 결과를 통해 부인, 며느리, 엄마로서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했듯이.
요즘은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하는 말이 애처롭게 들린다. 무작정 힐난하기에는 엄마로서의 내 삶과 무관하기 않기 때문이다. 나도 훗날 불쑥 그 말을 뱉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 천지에 투입 대비 산출을 따져가며 아이를 들들 볶고 싶은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능력주의 사회에서 적어도 자식이 남들보다 뒤쳐지지 않게 하려고 애쓰는 엄마들을, 교육 경쟁을 가속화시키는 주범이라고 싸잡아 비난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성공의 원인을 철저히 개인의 노력에서 찾고, 사회적 불안 수준은 높은데 보장 제도는 미비한 나라에서 각자도생이라도 해야지, 별 뾰족한 수가 있긴 한가. 더군다나 엄마의 희생이 적극적으로 요구되는 분위기에서 엄마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적절한 지원과 적당한 거리, 독자적 존재 간의 화합을 꿈꾸지만 갈 길은 멀고 자신은 없다. 나도 “널 만나서 반가웠어.”라고 우아하고 초연하게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