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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 May 10. 2022

천공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도록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누구도 함께 할 수 없는 당신의 성장을 기뻐하십시오.’ 나는 의아했다. 인간은 인정욕구를 가진 사회적 동물이 아닌가. 누구도 함께 할 수 없는 나의 성장은 어떤 걸 의미할까. 무릇 기쁨이란, 나누면 배가 된다고 하지 않았나. 한참을 그 구절에 붙들려 있었다. 얼마 전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라는 소설을 읽으며 릴케의 문장이 문득 떠올랐다. 왠지 그 의미를 알 것 같은 느낌.


  소설의 주인공 수전은 크고 좋은 집, 지적이고 유능한 남편, 사랑스러운 네 아이들까지 ‘누구라도 스스로 선택할 수만 있다면 선택하고 싶은 삶’을 누린다. 네 아이들 모두 학교에 들어간 후 ‘자기만의 삶이 있는 여성으로 서서히 해방될 준비’를 하지만, 그녀는 생각만큼 자유롭지 않다. ‘그녀가 억지로 수전이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려는 순간 아이들이 학교에 입고 갈 옷이나 버터 쪽으로 생각의 방향이 홱 바뀌어’ 버리곤 하기 때문. ‘엄마의 방’을 만들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려 한 계획도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수전은 ‘절대적인 고독, 아무도 그녀를 모르고 신경도 쓰지 않는 고독’을 위해 더럽고 허름한 호텔방을 찾는다.


  30여 년 전에 출간된 소설이지만 나는 수전에게 깊이 공감했다. 그녀의 공허와 불안, 우울과 슬픔은 현 시대 여성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전보다 기혼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 해도, 여전히 가사노동과 육아의 책임은 엄마에게로 기울어져 있으니까. 수전은 아내와 엄마로서의 삶이 ‘자신의 본질이 일시정지 상태로 차가운 창고에 들어가 있는’ 것과 같다고 느낀다. 결혼 전에는 유능한 광고회사 직원이었지만 지금은 ‘봉투 겉봉에 주소를 쓰는 일’이나 ‘여론조사원’같은 시간제 일자리를 떠올릴 수 있을 뿐. 그녀처럼 임신과 출산으로 경력이 단절되고, 가족 돌봄에 자아를 소진해 버린 여성은 지금 내 주변에도 널리고 널렸다.


  수전은 의문을 품는다. 결혼생활을 지탱하는 데에 자신만큼이나 큰 역할을 하고 있는 남편은 왜 갑갑함이나 초조함을 느끼지 않는 걸까? 출산 후,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10년째 두 아이 육아에 전념하고 있는 내 친구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남편은 승진을 거듭하며 사회적으로 자기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데, 난 왜 내 10년을 잃어버린 느낌이 드는 거지? 다른 여성의 돌봄 노동에 기대어 가까스로 경력을 이어가고 있는 내가 말했다. 글쎄,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성실하게 살겠다는 각오는 기존의 하던 일을 최선을 다해 계속하는 실천으로 이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남자들은 결혼 후에도 정체성의 큰 변화를 겪지 않는다는 말이지. 남몰래 느끼는 분노와 박탈감, 불평등 속에서 유지되는 집안의 화목, 모성에 속박된 정체성 등은 결코 수전의 이야기만이 아니었다. 나와 친구가 비혼을 열렬히 응원하게 된 데에도 비슷한 이유들이 나열되니까.


  호텔을 드나드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통속적인 오해―아내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것―를 구태여 부정하지 않은 채 수전은 결국 죽음을 선택한다. 나는 그녀가 남편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해서 자살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발적 추방을 통해 간신히 마련한 고독이 침해되고 말았으므로,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나만의 시간과 삶이 훼손돼 버렸으므로. ‘나는 혼자야, 나는 혼자야, 나는 혼자야.’라고 아무리 되뇌어도 고독의 행방은 묘연하고, 회복 불가의 절망만을 마주했으므로. 릴케가 말한 ‘누구도 함께 할 수 없는 당신의 성장’을 누릴 수 있었다면 수전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이혼을 상상한다. 언제든 나의 일이 될 수 있으므로. 이혼을 두려운 일, 혹은 감히 마음먹지 못하는 일로 만들고 싶진 않다. 남편의 삶에 종속되지 않겠다는 비장한 다짐인 셈. 시간을 쪼개어 책을 읽고 모임에 나가고 내 이름만으로 맺어진 인연들을 가족만큼이나 귀히 여긴다. 그이가 없어도 살 수 있어야 그와 함께여서 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그대들의 공존에는 거리를 두라, 천공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도록. … 함께 서 있으라, 허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서 있는 것을. 참나무와 사이프러스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칼릴 지브란의 문장을 가슴에 새긴다. 


  누추하고 퀴퀴한 호텔방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며, 수전은 ‘어둡고 창의적인 황홀경’을 느낀다, 야심한 밤 홀로 글을 쓰는 나도 편안한 고독, 은밀한 충만감을 만끽한다. 나의 수전과 릴케와 칼릴 지브란을 그이는 모르므로. 이 순간과 나의 글을 그에게 이해받을 필요도, 물론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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