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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 Apr 30. 2022

주는 삶, 기생하는 삶


  주말 아침이다. 모처럼 늦잠을 자고도 한참을 뭉그적대다가 11시가 가까워서야 첫 끼니를 먹는다. 멸치볶음, 콩나물 무침, 깻잎조림, 진미채볶음 등 온갖 밑반찬에 각종 김치들, 거기다 꽃게가 듬뿍 들어간 된장찌개까지…. 이만하면 진수성찬이다. 상다리 휘어지게 한 상 차리고 보니, 내가 한 거라고는 된장찌개 데우고 반찬 덜어낸 것뿐. 시댁이 지척에 있고 솜씨 좋은 어머님을 둔 덕에 참 잘도 챙겨 먹는다.


  어머님의 일상은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밥 짓기와 퍼주기. 은퇴하신 아버님의 삼 시 세끼뿐 아니라 맞벌이 아들 내외의 끼니까지 모든 게 어머님 손에 달려 있다. 매일같이 시장에 들러 신선한 재료들을 한 가득 사온 후, 씻고 다듬고 데치고 무쳐서 맛깔나는 어머님표 음식들을 뚝딱뚝딱 만들어낸다. 김치는 김장 때 뿐만이 아니라 무시로 만들어진다. 어떤 음식이건 기본량이 족히 한 솥은 되는데, 늘 하시는 말씀. 나눠 먹으면 되잖어…. 정성 가득한 음식들을 아들네뿐 아니라 가까운 친인척과 친구, 심지어는 사돈에게까지 인심 좋게 퍼나른다. 사돈에게 고추장, 간장, 된장에 김치까지 얻어먹는 집은 우리 집밖에 없을 거라며 엄마가 혀를 내두른다. 어쨌든 마다하시진 않는다는 거. 그 와중에 틈틈이 절에서 공양 봉사까지 하시는 어머님. 도대체 언제 쉬시는 건지. 여하튼 잘 먹는 게 최고다, 이게 우리 어머님의 지론이다. 정작 본인은 살찐다고 하루 한 두 끼밖에 안 드시면서.


  나는 평생 베풀 팔자야, 어머님이 입버릇처럼 되뇌는 말이다. 자꾸 듣다보니 그런가 싶기도 하다. 어머님께 받아먹는 게 너무 익숙하고 당연해져서 내가 언제 요리다운 요리를 해봤나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 원래 그쪽에 취미도 없거니와 센스도 부족해서 조금의 응용도 없이 레시피대로만 요리하던 위인이 그마저도 할 필요가 없어지자 그냥 ‘요알못’, ‘요리바보’가 되었다. 잘 먹고 잘 치우기나 해야지, 하고 살았다.


  죽은 어머니의 삶을 회상하는 책, 아니 에르노의 『한 여자』 속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어머니는 자기 자체로는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며, 자신이 주려는 것으로 사랑받기를 바랐다. (p.72)’ 주어야 사는 사람, 주는 행위를 통해 존재 이유를 찾고 자신의 필요를 확인하는 사람. 우리 어머님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서글퍼졌다.


  우리 집 냉장고도 채워줄 겸 손자도 볼 겸 해서 어머님은 자주 우리 집에 들르시는데, 올 때마다 그냥 앉아계시는 법이 없다. 말릴 틈도 없이 싱크대에 쌓여있던 설거지거리를 씻으시거나 며칠째 건조대에 방치됐던 옷가지들을 거두어 곱게 개기도 하고, 창문틀 묵은 먼지를 훔치는 등 일을 찾아서 하느라 내내 분주하시다. 그걸로 모자라 가는 길 양손에는 분리수거 할 거리가 한 가득. 어머님, 그냥 두세요. 제가 하면 돼요. 내가 몸 둘 바를 몰라 발을 동동거리면 돌아오는 대답은 매 한 가지. 내야 뭐 하는 게 있나, 집에서 노는 사람이…. 이게 뭐 별 거라고.


  하지만 나는 안다. 어머님 말씀대로 똑같이 ‘집에서 놀고 있는’ 아버님은 줄곧 소파만 지키고 계신다는 걸. 젊은 시절 맞벌이를 하셨을 때도, 바꿔 말하면 ‘집에서 놀고 있지’ 않았을 때도 각종 집안일은 모두 어머님의 몫이었다는 걸. 밥 짓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정리하는 일련의 과정이 결코 ‘별 거 아닌’ 게 아니라는 것도. 평생 몸을 가만두지 못한 탓에 그 모든 가사노동이 자동화돼버린 걸까. 안 하면 허전할 정도로. 어쩌면 ‘베풀 팔자’라는 것도 쉼 없는 노동을 미화하고 눈가림하는 말이 아닐는지. 남편과 자식을 비롯한 주변 타인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어머님의 하루를 그토록 바쁘게 만들었을까.


  그이에게 말했다.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적당히 사먹고 해도 되잖아. 맞벌이라는 이유로 우리가 어머님께 너무 의존해 왔던 것 같아. 이제 어머님 본인만의 삶을 좀 즐기셨으면 좋겠어. 그이가 말했다. 놔둬, 그게 엄마 삶의 기쁨이야…. 나도 막연히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내 깜냥으로는 어머님의 사랑과 희생을 가늠하지 못하는 걸 거라고. 다만 그의 무심한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설사 어머님의 진짜 속내가 그렇다 하더라도 과연 그게 다일까 의심해보는 단계정도는 거쳐야 하는 것 아닌가. ‘엄마표 밥상’에 가려진 엄마의 노동과 삶을 저토록 쉽게 요약해도 되는 건가. 그의 속편한 결론에서, 가사노동의 책임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이의 건조한 시선 같은 게 느껴졌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어머님께 음식을 한 번 배워 볼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몫의 노동이 더 늘어나는 걸 원치 않았으므로. 배달 반찬이나 외식으로도 대체할 수 있는 거니까. 물론 어머님표 음식들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그저 요리할 시간이 생기면 책이나 영화를 찾아보고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을 뿐이다. 끼니때마다 맛있는 음식을 차려주지 않아도 충분히 좋은 엄마, 좋은 아내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도 모르게 스스로 내면화한 여성의 관습적인 역할과 애써 싸우는 중이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아빠보다 엄마, 아버님보다 어머님이 먼저 돌아가시면 어떡하지? 아버지들의 죽음을 상상할 때보다 어쩐지 더 아찔하다. 아마도 혼자 남겨진 아버지들의 끼니 걱정 때문이 아닐까. 평생 차려준 밥만 먹고 살아오신 분들이 혼자서 밥은 잘 차려 드실까 하는 생각. 내가 딸이고 며느리여서 더 부담스럽다. 남동생이나 남편은 나만큼 부담을 느낄 것인가. 언젠가 명절에 일가친척이 다 모인 자리에서, 시댁 어른들이 작은 아버님네 며느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작은 어머님이 먼저 돌아가셔서 작은 아버님 혼자 사시는 상황이었는데, 아들네가 지척에 있어도 며느리가 반찬 한 번 안 챙긴다더라 하시는 거였다. 그들 부부는 맞벌이였다. 여성의 부재를 끼니의 부실함으로 실감하고 끼니 마련의 의무는 으레 다음 세대의 여성에게로 전가하니, 듣고 있기가 참으로 불편했다. 그 어디에도 아들의 의무는 없었다.


  언젠가부터 ‘엄마손’, ‘엄마표’ 이런 말들이 징글징글하게 느껴진다. ‘제일 맛있는 밥은 남이 한 밥’이라는 중년 여성들의 넋두리가 그냥 들리지 않는다. 엄마들끼리 여행을 갔는데 가장 좋았던 게 뭐냐고 묻자 ‘호텔 조식’이라고 답했다는 그런 이야기들. 웃기면서 슬프다. 모순적이게도 ‘집밥이 최고지’라고 외치는 이들은 거의 남자거나, 밥 짓는 노동의 수고로움을 몸으로 느끼지 못한 이들이다. 나 역시도 그 노동의 면면을 다 알지 못한다. 소위 ‘바깥일’을 하느라 다른 여성의 돌봄노동에 기대어 살았으므로. 어머님의 노동에 기생하는 삶, 끼니때마다 엎드려 절하고 싶은 마음과는 또 별개로 한 여자의 고단한 노력의 산물을 매일 마주하는 것이 그리 편하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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