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두어 달쯤 앞둔 어느 날, 지인이 불쑥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애 곧 입학이지? 한 번 읽어 봐, 도움 될 거야. 이제 곧 학부모가 된다는 생각에 뒤숭숭하던 차였는데, 그 마음을 꿰뚫어 본 듯했다. 마다할 이유가 없는 호의였다. 덥석 책을 받아들고 보니 책 제목이 무시무시했다. 『초등 6년이 아이의 인생을 결정한다』라니…. 이거 왠지 어깨가 더 무거워지는데?
사실 난 여태껏 육아서 한 권 제대로 읽은 적 없는 엄마였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기에도 시간은 늘 모자랐다. 전문가들이 쏟아내는 조언을 성실히 수행하느라 나와 아이를 옥죄게 되는 건 아닐까 두렵기도 했다. 이래야 한다는데 저렇게 할 배짱은 없으니, 차라리 모르는 게 속편했다. 그런데 이건 뭐, 초등 6년이 아이의 인생을 결정한다고? 단단히 각오하고 비장한 자세로 책장을 넘겨야 할 것만 같았다.
지레 겁을 먹고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한 달이 훌쩍 지나 버렸다. 빌린 책을 읽지도 않고 책장에 꽂아두고만 있자니 마음이 꽤나 불편했다.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이라는 큰 이벤트를 앞두고도 선뜻 그런 책 하나 펼치지 못하는 내가 무심한 엄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결국 그 책은 내 독서 목록에서 내내 후순위에 머무르다가 원래의 주인에게로 고스란히 되돌아갔다. ‘해야 함’이 ‘하고 싶지 않음’을 이기지 못했다.
비로소 마음의 짐 하나 덜고―그게 그다지 짐이어야 할 일인가 싶지만―홀가분한 상태가 되어 책장 앞을 서성이다가 무심코 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레바논의 대표 작가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였다. 차례를 살피다가 ‘아이들에 대하여’라는 꼭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순 있으나 그대들의 생각마저 줄 순 없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아이들 자신의 생각을 가졌으므로.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을 줄 순 있으나 영혼의 집마저 줄 순 없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영혼은 내일의 집에 살고 있으므로. 그대들은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속에서도 가 볼 수 없는 내일의 집에. 그대들이 아이들같이 되려 애쓰되 아이들을 그대들같이 만들려 애쓰진 말라. 왜냐하면 삶이란 결코 뒤로 되돌아가지 않으며, 어제에 머물지도 않는 것이므로.’
언젠간 읽어야지 하며 고이 모셔두었던 책이 참으로 시의적절한 순간에 제 발로 찾아온 듯 했다. 와, 이건 날 위해 준비된 문장이잖아. 실없이 중얼대며 책이 준 감동을 만끽했다. 육아서의 홍수 속에서 추세를 따르자니 안 내키고 외면하자니 찝찝했던 나에게, 이 문장들은 단숨에 ‘믿는 구석’이 돼 버렸다. 내 아이는 나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 내가 키우는 대로 아이가 자라지는 않는다는 것…. 그래, 이거면 충분하지, 다른 말이 뭐가 더 필요할까.
내친김에 또 다른 책 한 권을 더 꺼내 들었다. 미국의 한 독립 연구자 주디스 리치 해리스의 『양육가설』이라는 책이었다. ‘아이의 미래는 유전자와 부모의 책임에 달려 있다는 우리 문화의 가장 견고한 믿음에 의문을 던진 연구자’라는 작가 소개에 끌려 사게 된 책이었다. 놀랍게도이 책의 서두에는 앞서 언급한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속 구절이 인용되어 있었다. 이걸 왜 이제야 읽고 있나 싶을 정도로 흥미진진하고 설득력 있는 책이었다.
‘아이를 키우는 데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 그건 아이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많은 수의 어른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마을 안에서 놀이집단을 형성할 만큼 충분한 수의 아이들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특히 인상적인 구절이었다. 아이는 또래집단과 함께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 나가며, 아이의 미래는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는지의 여부보다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 곧 같은 세대에 속해 남은 삶을 함께 보내게 될 또래들과 잘 지내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었다. 작가는 책의 말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우리 부모들이 자녀를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도 착각에 불과하다. 이제 내려놓자. …… 긴장을 풀어라. 자녀가 어떤 인간이 되는지는 당신이 아이에게 얼마만큼의 애정을 쏟았는지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당신은 자녀를 완성시키지도, 파괴시키지도 못한다.’
부모가 아이를 완성시키지도, 파괴시키지도 못한다는 말은 어째서 이리도 든든한 위안이 되는가. 아이를 키우면서 종종 느껴왔던 두려움과 조바심과 죄책감의 근원을 비로소 알게 됐다. 내가 아이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오만은, 양육에 대한 과중한 책임감을 부여했고 양육을 진정으로 즐기지 못하게 했으며 아이의 삶과 내 삶의 교집합을 비대하게 만들었다. 그간 내가 각종 육아서를 회피해 온 것은 자식이 잘 되든 못 되든 일단 부모에게서 그 이유를 찾는 ―엄밀히 말하면 주로 엄마 탓을 하는―사회적 통념에 반기를 들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젠 더더욱 멀어지게 생겼다.
다행히 아이는 급박한 환경 변화에도 별다른 동요 없이 잘 지내는 중이다. 유치원 때보다 더 일찍 집에 오는 까닭에 놀이터에서 노는 시간이 두 배로 늘었다. 아이의 놀이터 인맥이 급속도로 넓어졌다. 아직 바람이 찬데도 땀까지 뻘뻘 흘리며 친구들과 뛰노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아이가 서서히 내 손을 떠나가고 있음을 느낀다. 우리가 공유하는 시간과 관계는 앞으로 점점 더 줄어들 것이다. 내가 없는 곳에서 내가 모르는 관계들을 만들어 나갈 아이의 미래를 상상한다. 내가 꿈속에서라도 가볼 수 없는 내일의 집에 아이의 영혼이 살고 있다니, 어쩐지 마음이 들뜨고 두근거린다.
나는 그냥 하던 대로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으며 살아야지. 꼭 육아서가 아니어도 엄마로서의 삶을 깨어 있게 하는 책은 얼마든지 많으니까.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 고심하기보다는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해야겠다. 그래야 아이를 키우는 일이, 아니 아이와 함께 사는 일이 온전히 즐거워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