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인 듯 편지 아닌 편지 같은 글
공선옥, 춥고 더운 우리집 _ 집의 역사, 나의 역사
내가 기억하는 첫 집엔 꽤 넓은 마당이 있었어. 사실 너무 오래 전이라 모든 기억이 희미해. 남아 있는 사진과 엄마의 이야기를 통해 재현해 낸 것일 뿐. 그런데 그 집에서 보낸 시간들 중에 유독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장면 하나가 있어. 볕 바른 마루 옆에 미닫이문으로 이어진 작은 방이 있었는데 그 방에는 오래된 전축이 있었지. 나는 종종 동화책 낭독 테이프를 틀어 둔 채 그 앞에서 책을 보곤 했어. 아이 둘을 돌보며 틈틈이 부업거리에 매달려 있던 엄마는 자기 대신 책 읽어주는 선생님을 내 옆에 붙여두신 셈이었지. 하지만 글자를 모르던 시절이었으니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와 내가 살피고 있는 그림의 내용은 어긋나기 일쑤였어. 나는 자주 엉뚱한 페이지를 펼치고 있었고, 내내 마음이 달아 있었던 기억이 나.
그래, 어쩌면 그때의 기억이 지금의 널 대하는 내 모습을 만든 것인지도 몰라. 먹이고 입히는 건 되는대로 해도, 책은 차고 넘칠 정도로 재어 놓는 욕심 같은 거. 낭독 음원 서비스를 마다하고 고집스레 내가 직접 책을 읽어주려는 마음 같은 거. 어린 날의 나는 그저 책을 핑계로 엄마를 내 곁에 두고 싶었던 거야. 함께 책 보는 내내 끊임없이 재잘대는 널 보면서 생각해. 이 시간이 꼭 기억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충만한 그 느낌만이라도 네 존재의 밑바닥에 깔릴 수 있기를. 그나저나 네가 “엄마, 책 읽어줘.”라고 말하며 품속을 파고들 날이 이제 얼마나 남은 걸까.
그 다음 집은 2층 주택이었는데, 우리 가족이 1층에 세 들어 살았지. 이상하게도 그 집에 대한 기억은 어느 것도 선명하지가 않아. 다만 그맘때 엄마와 함께 놀러갔던 친구네 집만 또렷이 기억 나. 세상에, 다락방이 있는 집이었어. 친구 방에서 가파른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작은 다락방이 나타났는데 아기자기한 장난감과 인형, 온갖 소꿉놀이 소품들로 가득한 공간이었지. 친구와 신나게 놀이를 하는 동안에도 너무 부러운 나머지 왈칵 울음이 쏟아지려는 걸 겨우 참았던 기억이 나.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엄마, 나는 왜 내 방이 없어? 우리집은 왜 OO네 집보다 작아?”하고 물었지. 엄마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모르겠어. 그 날 저녁 엄마가 평소보다 더 살갑게 대해준다는 느낌을 받았을 뿐.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엄마도 나만큼 부러웠을까.
그 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어. 대학생 때였는데 용돈이라도 벌어볼 요량으로 과외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지. 여고생의 방에 처음으로 들어선 순간 나는 그 옛날의 다락방이 떠올랐어. 내 방의 두 배는 되는 공간에 잘 정돈된 책상, 공주풍 캐노피가 드리워진 침대, 공기 정화 및 집중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식물 화분이 여럿 놓여 있었지. 하지만 정작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따로 있었어. 창가 쪽에 방바닥보다 50cm 정도 단을 높여 만든 알파공간이 있었는데 앙증맞은 소반과 좌식 의자, 예쁜 장식품과 사진 액자들이 그득한 진열장이 눈에 띄었어. 내가 한참을 두리번거리자 여고생이 무심하게 한 마디 하더라고. “전부 다 엄마 취향이에요. 이 나이에 너무 유치하지 않아요?”
그 여고생의 집을 들락거리던 시절을 떠올리면, 나는 과연 내가 받은 과외비에 부응하는 노동을 하긴 했는가, 소위 제대로 돈값을 했는가 싶어서 마음 한 구석이 영 찝찝해져. 그래도 꼬박꼬박 ‘선생님’ 소리 들으면서, 온갖 맛깔 나는 간식들로 과분한 대접을 받으면서 꽤 오랫동안 잘도 선생 노릇을 했었지. 부러움과 우월감, 그 사이 어디쯤을 왔다 갔다 하면서 말이야.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너에게 다락방이라는 공간은 무척 생소할 거야. 놀이텐트랑 비슷한 거라고 하면 좀 쉽게 이해하려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이들에게는 오롯한 자기만의 공간이 로망이니까. 어둡고 좁고 뭔가 두렵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비밀스럽고 신비한 곳. 어수선하고 애틋하고 뒤숭숭한 것들이 시간의 더께를 쓰고 움츠리고 있는 곳. 그래, 거기 어딘가에 있겠지, 하는 막연한 존재감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곳.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 다락이란 게 꼭 실제적인 공간의 형태를 띨 필요는 없지 않을까. 이게 나의 다락이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네가 언제 어디서든 자신만의 다락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
내가 처음으로 아파트에서 살게 된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였어. 15층짜리 복도식 아파트였는데 엄마, 아빠, 나, 동생, 할머니까지 총 다섯 식구가 함께 살기에는 사실 턱없이 좁은 평수였지. 거실이자 공부방이자 침실이기도 했던 공간에서 나와 동생은 정말 지치지도 않고 싸워댔어. 어쩜 그리도 맹렬히 서로의 삶에 참견했던 걸까. 떨어져 있고 싶어도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겠지.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건 결코 아니지만, 데면데면해진 지금의 우리를 새삼 확인할 때면 그때가 조금 그리워지기도 해.
그 시절엔 집 안이나 밖이나 늘 사람들이 복작복작 했던 것 같아. 아파트 놀이터며 공터는 함께 어울려 노는 아이들과 담소를 나누는 할머니들로 언제나 붐볐지. 그맘때 가장 즐거웠던 추억이 있어. 부녀회 주최로 열린 행사였는데, 주민단합대회 혹은 동네잔치 비슷한 거였지. 운동회를 방불케 하는 만국기 아래, 곳곳에 그늘막이 설치됐고 그 안에선 엄마를 비롯한 동네 아줌마들이 수육이며 족발, 과일, 떡 같은 것들을 그릇에 분주히 나눠담고 있었어. 이곳저곳에서 아무렇게나 놀던 우리들이 주린 배를 움켜쥐고 앓는 소리를 해대면 둥그렇고 넉넉한 엄마들이 그릇 가득 음식을 담아 주셨지. 바닥에 퍼질러 앉아 허겁지겁 음식을 삼키며 킬킬대던 우리, 상품 하나 타보겠다고 죽자고 훌라후프를 돌려대던 우리, 최고 히트곡이던 룰라의 ‘날개 잃은 천사’에 맞춰 신나게 엉덩이를 두들겨 대던 우리, 다들 그때를 기억하며 살고 있을까.
하원한 널 데리고 아파트 놀이터에 들렀는데, 아무도 없어서 시무룩해진 네 얼굴을 본 순간 그 옛날의 놀이터가 떠올랐어. 그 많던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가뜩이나 코로나로 인해 거리두기가 일상화된 지금, 너를 비롯한 이 시대의 아이들이 기억할 만한 흥성거림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걸까. 언제쯤 되찾을 수 있을까.
나와 동생은 비교적 이른 나이에 결혼했어. 엄마는 친구 분들께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지. “집구석이 재밌어 봐라. 그리 빨리 갔겠냐.” 사실 틀린 말은 아니야. 나도 실상은 독립을 꿈꾸며 결혼을 선택한 거였으니까. 결혼을 한다는 건 나만의 집, 은 아니더라도 우리만의 집을 가지는 걸 의미하니까. 누구의 간섭도 없이 온전히 우리의 취향과 기호를 반영하여 꾸민 집이라니, 생각만 해도 설레더라고. 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더라.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마련한 집인데다 너를 낳고 키우며 끊임없이 할머니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으니까. 게다가 가사노동의 주체가 된다는 건 부모님 슬하에서 편히 살던 때를 새삼 감사하게 될 만큼 고단한 것이더라고.
너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나와 네 아빠의 선택으로 마련된 공간에서 너는 어떤 하루하루를 쌓아가고 있을까. 우린 네가 이곳에서 함께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던 시간들처럼 아름다운 기억만 품게 되기를 바라지만, 또 모를 일이지. 어느 한낮 우리가 치열하게 싸우던, 서로에게 모진 말을 뱉어 내던 그 순간을 먼저 떠올리게 될지도. 내가 가진 유년의 기억도 내 부모가 의도하고 바라던 바와는 한참 동떨어진 것들이 많듯이 말이야.
네가 훗날 그간 살아온 날들을 돌아볼 일이 생겼을 때 부디 따뜻한 기억이 더 많이 떠오르길 바라. 설사 그렇지 않은 기억들이 혼재한대도 그 모든 시간이 널 키운 시간이란 걸, 네 존재를 채우고 있는 시간이란 걸 한번쯤은 생각해 주기를. 그 안에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가는 전적으로 너에게 달린 일이란 걸 꼭 기억해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