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뜻 답할 수 없다. 본디 명쾌한 대답이 불가한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어떤 사람에 대한 평가가 언제나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맺고 있는 관계의 양상에 따라, 그때그때 드러나는 여러 얼굴이 모두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영화 <좋은 사람>의 주인공 ‘경석’을 통해, 나는 나의 여러 얼굴과 마주할 기회를 얻었다.
“엄마 보고 싶어. 엄마한테 갈래.”
마지못해 경석을 따라나선 딸아이의 시선은 줄곧 차 창밖을 향해 있다. 전처의 부탁으로 아이를 하루 돌보기로 한 경석은 내내 난감한 얼굴로 아이를 다독이지만, 끝내 아이는 요지부동이다. 결국 경석은 화를 내며 아이를 윽박지르고, 겁먹은 아이는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아이에게 차 안에서 기다릴 것을 여러 번 당부한 뒤, 경석은 교실로 돌아와 세익을 다시 만난다. 도난 사건과 관련해서 백지로써 자신의 결백을 말하려 했던 세익은, 경석에게 서운함과 원망을 토로한 채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린다. 그 사이 아이는 사라지고, 경석은 뒤늦게 아이의 행방을 찾지만, 아이가 인근 도로에서 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옮겨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다급히 병원을 찾아와 자초지종을 따져 묻는 전처에게 경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아이는 왜, 경석을 그렇게도 거부했을까. 아빠에 대한 과거의 특정 기억 때문일 수도 있고, 함께 하는 시간이 적다 보니 자연스레 마음에서 멀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아이에게 경석은, 함께 있는 것조차 싫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서운한 감정을 이기지 못해 아이에게 버럭 화를 내고는 또 금세 미안해하는 경석의 모습이, 나는 전혀 낯설지 않았다.
‘폭력은 가정 안에서 손쉽게 재생산된다. 폭력의 찌꺼기들은 가정 내에서 가장 권력도 힘도 방어 수단도 없는 아이들에게 최종적으로 수렴된다.’
정지우의 에세이집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를 읽다가 깊이 공감했던 구절이다. 가장 약한 존재인 아이들은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기도 한다. 경석의 분노는 실로 무엇을 향한 것이었을까. 전처가 자신에게서 아이를 빼앗아 간 것만 같아서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가뜩이나 학교 일 때문에 피로가 누적된 상태에서, 아이에게조차 마음을 얻지 못하고 거부당하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하고 또 한심했을까. 그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행동을 옹호할 수는 없다.
아이를 키우면서 내 인간성의 바닥과 종종 마주하곤 한다. 훈육한다는 명목으로 아이를 다그치지만, 정작 내가 화가 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인 경우가 많다. 남편과의 사소한 갈등, 학생들에게 받은 상처, 기대와 어긋나게 흘러가 버린 일 등으로 인해 힘들었던 하루의 끝에서, 나는 자주 아이에게 화를 냈다. 잠든 아이의 천진한 얼굴을 보며 미안한 마음에 눈물지은 날이 얼마나 많았던가. 매번 다짐하지만, 또 번번이 같은 잘못을 저지르며 살고 있다.
경석의 엉성하고 무책임한 해명에, 경석과 전처의 갈등은 더욱 깊어진다. 서로를 책망하고 폭언을 쏟으며 둘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결국 전처는 경석을 상대로 접근금지가처분 신청을 하기에 이르고, 이를 전해들은 경석은 충격 받은 얼굴이 되어 병원을 나선다.
“넌 늘 이런 식이었어!”
경석과 전처가 서로에게 내뱉은 말이다. 두 사람이 이혼을 선택한 것은 각자가 지닌 어떤 면을 서로가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연의 끈을 부여잡고자 포기해야 하는 것이 너무 많다면, 혹은 서로를 깊이 수용하고자 하는 의지가 사라진 상태라면, 이혼은 유별난 것 없는 수순이라고 생각한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의 책 「당신이 옳다」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사람은 더 많이 오해하고 실망하고 서로를 상처투성이로 만든다. 서로에 대한 정서적 욕구, 욕망이 더 많아서 그렇다.'
결혼 생활을 긴 시간 이어온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와 삶을 공유하는 일에는 끝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부부는 부모-자식과 달라서 서로에게 한없이 주기만 하는 관계가 될 수 없다. 서로에게 받을 것이 있다고 믿는 두 사람이 갈등 없이 서로를 수용하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내가 신랑에게 바라는 것만큼 나에게는 실망과 결핍이 쌓이고 있었다. 정작 신랑이 나에게 바라는 것에는 소홀했으면서 말이다.
우리에게도 숱한 시험의 순간이 찾아오리라. 그 과정을 기꺼이 감내하려는 동기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부부로 살아갈 것이다. 나에게 그이를 맞추지 않으려는 노력, 그이를 그로서 환대하려는 노력, 함께 하는 시간뿐 아니라 각자의 시간도 소중히 지키려는 노력…. 나는 그 기나긴 노력의 길 어귀에 서 있다.
영화 후반부에서 경석은 도난 사건의 진짜 범인과 세익을 범인으로 지목한 트럭 운전사의 진술에 오류가 있음을 알게 된다. 진심으로 사과하는 경석에게 세익은 머뭇거리며 말을 꺼낸다.
“혼자 거리를 헤매던 아이를 봤을 때 선생님 딸이라는 걸 알아차렸어요. 경찰서에 데려다줄까 하다가, 선생님께 돌아가는 게 낫겠다 싶었죠. 그런데 제가 ‘아빠에게 가자.’라고 말하는 순간 아이가 갑자기 도로로 뛰어들었어요.”
아이가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려 했고, 그로 인해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경석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돌아선다.
최근에 뜨개질을 하다가 실타래가 꼬여버린 적이 있었다. 엉킨 실타래를 풀어보려고 여러 번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할 수 없이 엉킨 부분을 자르고 다시 이은 뒤에야 뜨개질을 계속할 수 있었다. 경석이 학교를 그만둔 것도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무거운 상실감과 죄책감으로 인해 주위 관계들을 지속할 의지도, 방법도 사라진 상태였을 테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경석의 삶은 어딘가에서 계속 이어지리라 믿는다. 결국 삶이란 것은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될 것투성이니, ‘이랬다면 어땠을까.’하는 후회와 아쉬움을 품은 채로…. 영화 <좋은 사람>은 지나친 이상주의에 빠지지 않고 현실적인 삶의 한 부분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었다.
감독과의 대화(GV)에서 제목에 대한 관객의 질문에 정욱 감독은 끝내 ‘좋은 사람’을 정의내리지 않았다. 정의내릴 수 없어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삶은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다.’라는 시인 안도현의 말처럼, 우리는 그저 살아내는 중일 뿐…. 함께 살아내는 존재들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고 겹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삶이 되기를 소망한다.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애쓰는 삶이 아니라, ‘살다보니 무언가가 되어 있더라.’며 회억하는 삶이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