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엄마라고 부르던 아이들이 생각나. 동갑내기 친구를 엄마라 부르는 마음은 어떤 걸까. 삼남매의 맏이라서, 한참 어린 막냇동생이 있어서, 양보와 돌봄이 생활화된 너에게 아이들은 엄마 같은 편안함을 느꼈을지도. 고작 십대 후반에 엄마 소리를 듣는 네 기분은 어땠을까. 내심 흐뭇했을까, 그러려니 했을까, 혹은 기대에 부응하려 더 엄마스러워져야 했을까. 유아교육을 전공하고 싶어 했던 네 바람도 어쩌면 그 별칭의 연장선이었던 건 아닐까.
졸업 후 어언 7년, 오랜만에 밥 한 끼 하려 만났을 때도 재바르게 물 컵과 수저를 챙기고 내 앞 접시에 살뜰히 음식을 덜어주는 너를 보며 여전하구나 싶었지. 함께 나온 네 살 난 딸아이를 너무도 능숙하고 다정하게 챙기는 모습에서 10대 소녀가 아니라 어엿한 진짜 엄마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문득 애틋한 마음이 들었어. 너 정말 엄마 다 됐구나, 라고 말해놓고는 말에 담긴 의미들이 복잡하게 얽혀, 순간 서글픈 마음이 든 것도 너는 몰랐겠지. 이렇게 빨리 엄마가 되려고 그리 일찍부터 엄마로 불린 걸까, 너는.
원하던 대학과 학과가 아니어서 입학 후 내내 방황하고 있노라고,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네 어머니로부터 연락을 받았을 때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 고민했어. 나 역시 입시 성적이 기대에 못 미쳐서 괴로운 시간을 보냈고, 학점 관리에 용쓰고 전과하는 과정에서 남몰래 겪은 열등감이 있기에 너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생각했지. 하지만 별 뾰족한 대안이 있는 건 아니었어. 이왕 진학한 학과에 적응해서 새로운 길을 찾아보거나 마음 독하게 먹고 재수를 하거나. 간절히 원하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네게 맞는 길이 열릴 거라는 희망 넘치고 진부해 마지않는 조언 외에는 딱히 다른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지. 육아휴직 후 채 돌도 안 된 아기와 씨름하던 시절에, 덜컥 널 우리 집으로 초대해서는 그 정신없는 와중에 난 뭐라고 주절거렸던 거니. 다른 기억은 다 가물가물한데, 이 장면만은 또렷이 떠올라. 네가 내 아이를 안고 어르고 달래며 귀여워하던 장면 말이야.
놀랍게도 몇 달 뒤, 넌 돌연 캐나다로 유학을 간다고 했어. 전연 예상치 못한 선택지였지. 사실 조금 부럽기도 했단다. 네겐 그런 부모님이 있었구나. 품안의 자식을 멀고먼 타지로 보내는 불안감을 자식의 결정을 존중하는 용단으로 극복하는, 그런 멋진 부모님. 한편으론 그런 과감한 결정을 내린 네가 마냥 용감해 보였단다. 넌 왜 한국을 떠나고자 했을까. 또다시 입시 경쟁의 한복판으로 뛰어들기가 두려워서, 혹은 그 일련의 과정에 염증을 느껴서? 너에 대한 기대와 실망과 그 모든 평가들로부터 숫제 자유롭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지. 아니면 너의 오랜 꿈이었거나, 내가 미처 몰랐던. 가끔 생각해. 애초에 네가 목표로 했던 대학과 학과에 진학했다면, 넌 계속 한국에 살았을까.
아는 이 하나 없는 완벽한 타지에서 적응하랴, 공부하랴 애쓰던 네가 결국 원하던 대학에 입학하게 됐을 때, 또 그곳에서 사랑하는 이를 만나고 함께 곳곳을 누비며 재미있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네가 여전히 염려스러웠지만 더없이 기특하고 대견했단다. 그러다 불쑥 찾아온 너의 결혼 소식. 이제 겨우 스물넷인데, 아직 너무 어린데, 괜한 노파심에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가 싶어 이것저것 캐묻던 내가 생각나. 교포 2세, 열 살 연상이라는 말만 듣고 혼자 이런저런 시나리오를 쓰다가 문득 생각했지. 내가 무엇을 판단할 수 있을까 하고. 나보다 훨씬 강단 있게 제 생을 꾸려가고 있는 너인데 말이야. 다만 그 먼 곳에서 남몰래 마음 고생했을 그간의 너를 다독이며, 네게 든든한 의지가 되었을 그이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로….
제자의 결혼식이라니. 내 결혼식에 잊을 수 없는 축가 선물을 해준 너였는데, 불과 7년 후에 네 결혼식을 내가 찾게 될 줄이야. 네 배우자가 된 그이에게 "저, OO이 담임인데요, 잘 부탁드려요, 우리 OO이."라고 말했었지. 담임이라니, 졸업한지 4년이 지났는데. 불쑥 내뱉은 말에 혼자 머쓱했던 걸 너는 아는지. 동생들의 축하 무대에 함께 리듬 타는 신부의 모습은 정말 예뻤어. 뱃속에 아이를 품고 있는 신부라기엔 너무 가뿐하고 상큼해서 쉬쉬하던 일을 자랑삼아 말해버릴 뻔 했다고.
어느새 사 년차 엄마가 된 너와 제법 조잘대는 네 딸아이를 보며 그간의 세월이 실감났단다. 배우자, 시댁, 아이 등을 주제로 너와 나눈 대화는 여느 엄마들과의 대화나 다름없었지. 우리 관계의 출발점이었던 교사와 학생의 위치는 어느덧 까마득한 일이 돼버렸으니까. 폭풍 같은 일상의 변화, 사소하고 치명적인 갈등의 중첩, 서러움, 행복감, 외로움 같은 것들이 앞다퉈 부침하는 감정의 파고, 이 모든 걸 나보다 한참 어린 나이에 겪었을 네가 한없이 안쓰럽기도 했어. 물론 나보다 더 수월하고 담담하게 그 시간을 살아내고 있을 수도 있겠다만.
스무 살, 입시에 실패했다는 패배감으로 방황하던 너에게 내가 해줄 말이 딱히 없었던 것처럼 지금도 마찬가지인 걸. 그저 나를 잃지 말자고, 엄마이되 엄마이기만 하지는 말자고. 이건 뭐랄까, 나도 힘든 부분이라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 같은 것일 수도. 자주 내 시공간을 자유롭게 운용할 수 없더라도 내 서사의 편집권만은 꿋꿋이 지켜내는 것, 그 타협의 접점에서 우리는 또 다른 겹을 만들어갈 테니까. 이왕 엄마된 삶, 서로에게 힘이 돼주면서 말이야.
딸아이의 손을 꼭 붙잡고 길을 건너는 네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봤어. 다음 날이면 넌 또다시 그 먼 길을 날아 캐나다의 집으로 돌아가야 했지.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너의 세계에서 나와 같고도 다른 삶을 살아가는 네 모습을 떠올려 봐. 몸은 멀리 있어도 ‘우리 모두 엄마’라는 끈끈한 연대의식이 너와 나를 더 가깝게 만들어 주는 듯 해. 너의 바람대로 네 딸은 팍팍한 경쟁 속에서 때이른 좌절을 맛보지 않기를. 어디서고 행복할 수만은 없겠지만 각자의 선택이 만들어낸 삶의 영역 안에서 부디 잘 존재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