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딱 그 정도였는데
김동수의 『감기 걸린 날』이라는 그림책에는 깃털 뽑힌 오리들이 등장한다. 엄마가 오리털 점퍼를 새로 사준 날, 아이는 꿈속에서 헐벗은 오리떼를 만난다. 털이 없어 추운 오리들에게 옷 속의 깃털을 꺼내어 하나하나 심어주는 아이. 아이의 착한 마음에 슬며시 미소 짓고, 아주 잠깐 오리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을 뿐, 겨우내 아무렇지 않게 오리털 점퍼와 퍼 트리밍 코트를 입고 다녔다.
또 한 권의 그림책. 요르크 슈타이너와 요르크 뮐러의 『토끼들의 섬』. 주사위처럼 생긴 사료를 컨베이어벨트로 실어 나르고, 수백 마리의 토끼를 비좁은 철창에 가두어 사육하는 ‘토끼 공장’에 대한 이야기다. 오래전부터 이곳에 살았던 커다란 회색 토끼의 철창에 조그마한 갈색 토끼가 새로 들어온다. 갈색 토끼의 제안으로 환기통을 통해 공장 밖으로 탈출하게 된 그들. 수많은 위험 요소를 마주하고 겁에 질려버린 회색 토끼는 토끼 공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결국 둘은 각자의 공간에서 살아가기로 하고 서로에게 행운을 빌며 헤어진다. 구속과 자유, 안주와 모험의 이분법적인 시선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 채 책장을 덮었다. 토끼들의 상반된 선택과 삶은 인간의 그것을 상기하는 장치였을 뿐.
앞선 두 권의 책을 근래 들어 다시 꺼내어 읽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여러 번에 걸쳐 잽(jab)을 맞다 보니 문득 모든 게 달라 보이기 시작했으므로.
2. 잽, 잽, 잽. 우연은 없다
동네 책방에서 하는 글쓰기 모임에 나가고 있는데, 책방 알바생과 모임 멤버 중 하나가 비건임을 알게 됐다. 두 사람 모두 20대 중반의 여성이었는데, 간식으로 사간 샌드위치를 입에도 대지 않았다. 식빵을 만들 때 들어간 우유, 버터, 달걀과 샌드위치 속 햄과 치즈 때문이었다. “아유, 고기, 달걀, 우유, 치즈 빼면 뭐 먹고 살죠?” 나름 걱정 어린 질문이었으나 무지하고 무례했다. ‘참 피곤하게 사는구먼.’과 같은 속내가 숨겨져 있었으니. 내가 실제로 마주한 비건은 그들이 처음이었다. 비건의 정의도 그날에서야 제대로 알게 됐다. 비건을 검색한 이력은 SNS 알고리즘을 통해 각종 비건 맛집 리스트, 비건 식단표, 비건 제품 판매처 목록들로 되돌아왔다.
두 번째 잽은 양다솔의 에세이집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 중 「최초의 만찬」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친한 친구들이 갑자기 육류를 먹지 않는 ‘페스코’, 완전 채소만 먹는 ‘비건’, 완전 채소 중에서도 불로 조리하지 않은 날것만 먹는 ‘로비건’이 되어 나타난 데에 그녀는 적잖이 당황한다. 사뭇 결연한 눈빛으로 『어쩌다, 비건』이라는 책을 선물로 나눠주는 친구를 바라보며 그녀는 생각한다. ‘올 것이 왔군.’ 친구들과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자신도 함께 하겠다는 푸념 섞인 선언을 뱉어 버린 후, 그녀의 부엌은 ‘전 세계에서 날아온 비건 식단을 위한 식재료들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실험하는 연구실’이 되어 버린다. 오로지 나밖에 모르던 자신이 지구 어딘가에 있을 누군가를 위해 불편을 감수하고 변화를 시도하면서 ‘세상 모든 생명과 겸상을 한 기분’을 느꼈다는 대목에서는, 도대체 무얼 먹고 사느냐던 내 질문을 할 수만 있다면 회수하고 싶었다.
얼마 후, 글쓰기 모임의 비건 친구가 비건을 지향하면서 눈칫밥 먹게 된 사연을 글로 써왔기에 좀 더 적극적인 태세로 질문했다. 비건을 지향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있었는지, 있었다면 그게 무엇인지. 이야기 중에 거론된 책은 공교롭게도 『아무튼, 비건』이었다. 뭐야, 이건 운명인 듯? 세 번째 잽이었다. 당장 책을 구매했다. 책의 주된 키워드는 ‘타자화’와 ‘연결감의 회복’. 사람들이 동물을 오직 물건이나 고기로만 생각하는 이유는, 동물이 가장 타자화된 타자, 남 중의 남이기 때문이라는 지적. 따라서 비건의 핵심은 ‘거부가 아니라 연결’임을 강조했다. 이 대목에서 매우 뜨끔했다. 나 역시 비건은 동물성 식품을 ‘거부’하는 자들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기에. 비건이 되는 것은 ‘산업과, 국가와, 영혼 없는 전문가들이 단절시킨 풍부한 관계성을 회복하는 하나의 사회운동’이라는 걸 알게 됐다. 양다솔 작가가 비건식 식사를 하면서 느꼈던 더없는 충만감도 결국 ‘연결성’에서 비롯된 것일 테지.
네 번째, 다섯 번째 잽은 연이어 날아왔다. 오랜 시간 책장 속에 꽂혀만 있던 책이 불현듯 눈에 들어온 것.(책이란 진짜 찾아오는 타이밍 같은 게 있는 걸지도.) 미국의 비건 운동가 멜라니 조이의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는 ‘육식주의’ 시스템의 폭력적 이데올로기를 폭로한다. 고기를 먹을 때 느낄 수도 있는 도덕적 불편함을 완화하기 위해 ‘비가시성’이라는 방어 수단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 그로 인해 우리는 ‘능동적인 시민’이 아니라 ‘수동적인 소비자’로 살아 왔음을 지적한다. “그들이 보지 말라고 하면 우리는 고개를 돌린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수십억 마리의 동물이 야외의 평화로운 농장에서 산다고 그들은 말하는데,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임에도 우리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처럼 행동하는 까닭은 우리 대부분이 의식의 어느 차원에서는 정말 어떤 일이 벌이지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건 모른다는 것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 직시로 인해 감수해야 할 죄책감과 불편, 포기해야 할 쾌락 등이 애써 고개를 돌리게 하는 것인지도. 그래 왔으니까, 다들 그렇게 하니까, 그래 봤자 소용없다는 냉소를 앞세워 어렴풋이 알고 있는 진실이나마 의식 저편에 묻어두는 것인지도. 나는 비건에 대해 몰랐던 게 아니라 알고 싶지 않았던 거다.
탐욕스럽게 책을 읽고 영상을 찾아 봤다. 미국의 동물 권리 운동가 게리 유로프스키의 말처럼 고기를 먹는 게 단순히 습관, 전통, 편이성, 그리고 맛 때문이라면 환경과 윤리와 건강을 담보하면서까지 육식을 고집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지금이라도 알게 된 건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었으나, 앎이 삶이 되는 건 또 다른 문제여서 나는 덜컥 겁부터 났다.
3. 걸림돌들
거실에 신문지를 넓게 펼쳐놓고 가운데는 버너와 프라이팬, 빙 둘러 김치, 파절이, 각종 쌈채소를 놓은 뒤, 온 가족이 함께 삼겹살을 구워 먹던 유년의 기억은 내게 매우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특별한 날 간혹 하던 외식도 으레 고깃집 아니면 횟집이었고, 쿠폰을 열 장, 스무 장씩 모아 덤으로 먹은 치킨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 아이가 태어난 후 손수 이유식을 만들던 때에는 최고급 한우를 잘게 다진 뒤 소분해서 얼려두는 게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나나 아이나 태초부터 다른 생명의 희생에 기반한 삶이었다. 아이가 크면 크는 대로 철분 섭취라는 명목과 고기 반찬에 환장하는 아이의 기호(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를 존중하여 식탁에 고기가 빠지는 날이 거의 없었다. 집 앞 단골 식육점에 적립된 포인트가 십만 점을 넘어섰고, 치킨 쿠폰도 돌아서면 쌓여 있었다.
치즈, 달걀, 우유, 생선도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구워 먹고 삶아 먹고 풀어 먹느라 세 식구 사는 집에 기본 달걀 구매량이 매번 두 판씩이었다. 요리에 취미도 없고 시간도 없고 귀찮기도 해서 냉장고는 갖은 냉동식품, 반조리 식품들로 넘쳐났다. 죄다 육가공 제품이었다. 떡갈비, 돈까스, 치킨너겟, 함박스테이크를 종류별로 보유하고 냉동한우곰탕과 한 마리씩 진공 포장된 생선은 떨어지기 무섭게 채워 넣었다. 가까이 사는 어머님이 해주시는 나물 반찬, 김치류, 찌개 등이 없었다면 맨날 배때기에 기름칠만 하면서 살았을지도.
상황이 이 지경이니 당장에 무슨 반찬을 해먹어야 하나가 고민이었다. 나와 그이는 그렇다 쳐도 아이는 갑자기 웬 날벼락인가. 아홉 살 평생 고기 식단에 적응되어 있었는데…. 비건 식품 사이트를 뒤져 콩고기부터 구매했다. 각종 야채를 섞어 나름 맛있게 구워 줬더니(물론 내 생각) 대뜸 하는 말. “엄마, 이거 뭐야? 고기 아니지? 맛이 이상해.” 조금 다른 부위일 뿐이라며 얼렁뚱땅 넘어가려 했으나 아이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한껏 비장하게 숨을 고른 뒤, 지구상의 숱한 동물들이 사람들 때문에 억압된 삶을 살고 잔인하게 도살당하고 있다고, 우리 앞으로 비건을 지향하며 살자고 했더니 아이가 무구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그래도 고기는 포기 못해. 치킨도 못 먹어? 그건 너무하잖아.” 순간 허탈했다가 이내 반성했다. 그래, 너무 섣불렀지, 섣불렀어. 도대체 어떤 반응을 기대한 거야. 당장 “네, 그럽시다, 어머니.” 뭐, 이럴 줄 알았냐. 식습관은 결국 가정에서 형성되게 마련인데 누구를 탓하겠어. 며칠 뒤엔 품목을 바꿔 비건식 함박 스테이크를 구워 줬더니 다행히 모르고 넘어갔다. 미묘한 맛의 차이를 덮어 보려고 치즈와 달걀프라이를 얹어 주긴 했지만…. 그래, 집에서라도 조금씩 서서히 암암리(?)에 바꿔 보자.
하지만 산 넘어 산이라는 거. 지금이야 아직 휴직 중이니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내 식대로 해먹을 수 있다지만, 학교에 복직하면 급식은 어떡하나. 급식 먹는 즐거움으로 학교 다녔는데.(애나 어른이나 똑같습니다.) 아아, 남이 해준 밥이 제일 맛있는 법인데. 하루도 고기 반찬이 빠지는 날 없는 급식이라니. 그럼 도시락을 싸가야 하나요. 그간 손수 도시락 싸오시는 선생님들을 보면서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한다, 아침에 바빠 죽겠는데 도시락 쌀 시간이 어딨냐, 그랬던 난데…. 나는 과연 그 엄청난 수고로움을 무릅쓰고 비건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교직원 회식은 대부분 고깃집 아니면 횟집에서 하는데, 그때는 어쩌지. 비건임을 밝힌 후 기본 채소 밑반찬만 깨작거려야 하나. 아니면 그때만 비건 아닌 척 맛있게 먹어 줘야 하나. 아예 회식을 빠져야 하나.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지끈.
마지막으로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문제. 나의 겨울을 지켜주던 오리털·거위털 점퍼, 결혼 즈음에 충동적으로 구입한 밍크조끼와 목도리, 여러 벌의 가죽 신발과 자켓, 그리고 가방들은 다 어떡하나. (하, 많이도 샀네.) 비건을 지향한다면서 버젓이 그것들을 입고 걸치고 신고 다녀서야 되겠는가. 아무것도 모를 때 산 것들이에요, 라고 하면서 구차하게 설명을 붙여야 하나. 『아무튼, 비건』의 작가 김한민 씨는 이미 보유하고 있는 것들은 닳을 때까지 착용하거나 기증하는 게 낫다고 했지만, 내가 또 이 모든 걸 흔쾌히 기증할 위인은 못 되니까. 매일매일 이런저런 주위의 시선과 질문에 나는 꿋꿋이 내 신념을 표명할 수 있을 것인가. 비건이랬다가 어느 순간 슬그머니 철회하는 우스운 꼴만 벌어지진 않을까. 끝까지 할 수 없다면 시작도 안 하는 게 맞는 건가.
철저히 실천해 본 것도 아니면서 머리로만 온갖 사태를 가정해본 나는 소수자의 일상과 기분을 감히 상상해본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쓸 수밖에 없고 매번 자신에 대해 설명해야하는 것 자체가 소수자인 거니까. 물론 인종이나 성별, 거주지를 기준으로 삼으면 나 역시 주류가 못되겠지만, 대졸자, 비장애인, 이성애자라는 점에서는 마이너 취급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 비건이 된다면 일정 부분 자발적 소수자가 되어야 하는 거니까. 거대한 생명공동체의 일부로서 의식 있는 식생활을 위해, 나와 환경에 무해한 소비를 위해, 연결되고 충만한 삶을 위해, 라는 대의에는 충분히 공감하지만, 일상에서 부딪히는 숱한 걸림돌이 언제고 내 결심을 무산시킬지도 모른다. 허나 어쨌든, 얼마나 시간이 걸리든, 설사 몇 번을 번복할지라도 ‘비건적’인 삶을 지향하고 완성해 나가야 한다는 것에는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한 책임은 이토록 크다. 그래서 내내 외면해 왔겠지만.
4. 이제야 보이는 것들
자, 멀고 먼 길을 돌아 다시 그림책 이야기. 가슴털과 깃털이 뽑혀나가 벌건 살이 들어나 있는 오리들, 아이들이 보는 그림책인지라 흉물스러운 묘사는 아니지만 이건 분명 끔찍한 장면이다. 털을 돌려달라는 오리의 부탁에 아이는 흔쾌히 옷 속의 털을 꺼내어 오리들에게 되돌려준다. 거대한 산업 시스템과 타자화, 파편화를 통해 의도된 단절, 어른들의 무감각해진 윤리의식과 편협한 우월의식을 부끄럽게 하는 건, 아이가 가지고 있는 직관적 연결고리다. 너도 춥겠구나, 너도 아프겠구나, 내가 너에게 빚을 졌구나, 하는…. 밤새 이불을 잘 덮고 자지 않아서 감기에 걸렸다는 엄마의 지적이 관습의 말이라면, 옷 속에 든 깃털을 오리들에게 모두 돌려주었기 때문에 감기에 걸렸다는 아이의 시선은 다른 생명을 위해 나의 편이를 포기하는 비건의 말이다. 물론 점퍼 속 깃털은 여전히 실재하므로 삐죽 빠져나온 깃털 하나가 다시 현실을 자각하게 한다. ‘어차피’, ‘너 혼자 그래 봤자’가 난무하는 현실 속에서 ‘그럼에도’, ‘나부터라도’에 힘을 실어 주려면 변화를 믿는 마음부터 가져야겠다는 생각.
컨베이어벨트로 운반되는 사료를 받아먹으며 철창 안에 갇혀 본성마저 잃어버린 토끼들은 어떠한가. 커다란 회색 토끼가 공장 밖에서 처음으로 본 시냇물과 도로를 컨베이어벨트로 착각하는 상황은 웃기지만 슬프기 그지없다. 토끼 공장에 제 발로 돌아가는 회색 토끼를 무지하고 미련한 존재로 여기며 마냥 손가락질 할 수 있는가. 그들은 인간에 인해 본성이 거세된 희생양일 뿐인데. 다시 살펴보니 새삼 의미심장한 부분이 눈에 띈다. 갈색 토끼가 회색 토끼를 공장으로 데려다 주는 길에, 둘은 우연히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를 발견하게 된다. 그들이 고개를 갸웃하며 하는 말. “더 큰 동물들이 사는 공장일까?” 비좁은 철창이 겹겹이 쌓여 있는 토끼 공장의 모습은 언뜻 보기에 아파트와 비슷하기도 하다. 토끼들이 공장식 축산 시스템에 갇혀 살아가듯, 우리 역시 ‘육식주의’의 폭력적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진 시스템 속에서 ‘수동적인 소비자’로 살고 있는 것 아니었나. 회색 토끼가 결국 공장으로 되돌아왔듯이 우리도 이 시스템에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부디 철창 벽으로 단절되어 과거도 잃고 현재도 잊고 미래에도 무심한 공장 속 토끼들 같은 존재가 되지는 않기를.
깃털을 빼앗긴 오리들, 공장 속 토끼들을 구하는 일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조금씩. 적어도 나부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