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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 Mar 29. 2023

너와 함께하는 여행



  “예전의 자신이라면 결코 하지 못했을 일을 훌쩍 하게 만드는 힘, 그게 자녀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최혜진의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에서 큰 위로가 되었던 한 문장. 아니 잠깐, 나는 왜 ‘위로’라는 단어를 쓴 걸까, ‘공감’이 아니라. 무심코 뱉은 말에 속마음이 담긴 듯해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을 좀체 내려놓지 못했던 나로서는 지레 뜨끔할 만도 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유럽의 대표적인 그림책 작가들을 인터뷰한 내용이다. 그들이 지닌 창의성의 원천과 그림책 작가로서의 소신, 부모로서의 양육 철학 등에 관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좇아가다 보니, 흡사 한 권의 육아서를 읽고 있는 느낌이었다. 앞서 인용한 문장은 10명의 인터뷰이 중 프랑스의 그림책 작가 벵자맹 쇼의 말이다.

  그의 대표작은 아기 곰의 좌충우돌 모험을 다룬 5부작 시리즈인데, 그 중에서도 『곰의 노래』와 『아기 곰의 여행』을 특히 재미있게 읽었다. 아기 곰이 숲속 동굴을 벗어나 도시의 오페라 극장, 신비한 열대 섬과 같은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는 이야기인데, 무언가에 꽂히면 앞뒤 재지 않고 직진하는 게 영락없는 어린애의 모습이었다. 아이들이야 낯선 곳을 탐험하며 호기심을 채우는 과정에서 성장한다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언제 닥칠지 모를 위험 때문에 여간 걱정스러운 게 아니다. 헐레벌떡 아기 곰을 뒤쫓는 아빠 곰의 모습이 웃기면서도 안쓰러웠다. 자식 때문에 애태우는 여느 부모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으니까.

  그러다 문득 벵자맹 쇼의 말의 떠올랐다. 아닌 게 아니라 아빠 곰은 아기 곰을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혼자라면 결코 가지 못했을 곳을 가 보기도 하고, 난생 처음 하는 경험도 얼결에 해버린다. 이를 테면 휘황찬란한 오페라 극장 무대에서 노래 부르기, 커다란 호화 유람선 타기, 아름다운 산호초가 가득하고 신기한 물고기와 인어가 헤엄치는 환상적인 바닷속 구경하기, 열대 섬 축제에서 사람들 틈에 끼어 함께 춤추기 같은 것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성장하고 있는 존재는 아기 곰만이 아니었을지도.


  아이를 키우며 나는 종종 이런 생각에 빠지곤 했다. 나 혼자라면 여기서 이러고 있진 않을 텐데…. 아이 때문에 할 수 없는 것들이 차곡차곡 쌓일 때마다 불끈 울화가 치밀었다. 아이 덕분에 얻은 것들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으며, 감사의 마음은 이내 옅어졌다. 엄마 된 삶이 내 인생의 무한한 선택지를 제한해 버린 것만 같아서, 결혼 제도 자체에 대해서 회의적인 사람이 되었다. 어쩌면 그건, 엄마로서 포기해야 할 목록이 아빠보다 더 많은 현실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 때문이었을지도. 날개 하나가 꺾인 기분을 누르며 가정의 평화를 위해 모성애로 포장해야 할 것들이 참 많았다.

  그러다 최근에 『돌봄과 작업』이라는 책을 읽게 됐는데, 부제가 ‘나를 잃지 않고 엄마가 되려는 여자들’이었다. 일과 돌봄을 양립시키는 방법, 어려움, 보람 등에 대해 11명의 여성이 저마다의 사연을 털어놓은 책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서유미 소설가가 한 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아이를 낳은 뒤 나는 줄곧 어떤 방향의 생각 쪽으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것은 대부분 후회와 관련된 것이었고 들여다보면 검게 출렁였다. 시간이 많았다면 소설을 더 잘 쓰지 않았을까, 돌아보는 게 대표적이었는데 그 생각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텼던 건 그게 진실이  아니라는 걸 내가 더 잘 알았기 때문이다. 결혼하지 않고 아이가 없던 시절에도 나는 게으르고 집중력이 부족했다. 그때 인생은 다른 방식으로 버겁고 복잡했고 나는 얄팍했다. 삶의 이력이 길어질수록 인생의 고통은 다양하고 인간의 삶은 복잡한 방식으로 불행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손톱 끝을 물어뜯게 만들던 문제가 해결되어도 인생은 꽃밭으로 변하지 않는다. 그냥 나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핑계를 대고 싶은 것이었다.”

  마지막 문장에서 가슴이 철렁했다. 그래, 나도 핑계를 대고 싶었던 것인지도. 그간 상상해 오던 대로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삶을 선택했다면, 내 인생은 지금과 아주 다를 것인가. 결혼 전, 홀로 가뿐했던 그때의 나는 그다지 생산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보다 책을 멀리했고, 사회 문제에도 무심했으며, 일에도 그리 열정적이지 않았다. 결혼과 출산으로 맺어진 관계가 없다고 해서 오롯이 홀가분한 것도, 완벽히 자유로운 것도 아닐 텐데. 이리저리 얽히고설켜서 서로 침범하고 침범당하며 살아가는 것이 삶의 본질인 것을.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삶이란 게 애초부터 가능한가.

  그림책의 세계에 빠지게 된 것도, 페미니즘을 공부하게 된 것도, 부모의 삶을 연민하고 미래 세대의 삶을 염려하게 된 것도 아이를 낳은 후의 일이었다. 삶의 스펙트럼을 넓히려면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내 삶이 그렇게 흘러갔을 뿐. 아이로 인해 한층 넓고 깊고 복잡해진 세상에 지레 기가 질려 자주 버거웠지만, 그만큼 내가 새로이 얻은 것도 차고 넘쳤다. 아빠 곰이 오페라 극장 지붕 위에서 발견한 수많은 벌통과 멋진 전망도 아기 곰 덕분이었고, 머나먼 열대 섬에서 고향의 향기로운 숲과 이끼 침대를 떠올리게 한 것도 아기 곰의 노래였듯이.

  예전의 나라면 결코 하지 못했을 일을 훌쩍 하게 만드는 힘, 그게 자녀의 힘이라는데 ‘위로’든 ‘공감’이든 그게 무슨 대수랴. 기왕지사 엄마 된 삶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만들어 가느냐가 더 중요할 것이다. 무언가를 얻고자 부모가 된 것은 아니지만, 부모가 되고 보니 얻어진 것들을 좀 더 살뜰히 돌봐야겠다는 생각. 어떤 선택이든 일장일단이 있는 법이고, 선택 이후의 삶을 잘 살아내는 것이 지금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일 테니까.

   

  『아기 곰의 여행』 마지막 장면에서는 아빠 곰이 아기 곰의 노래를 들으며 잠에 빠진다. 

  “키니키니키니 마이키네 왈루왈루, 말리네 리니니.(북적대는 바닷가에 소라고둥과 아기 곰, 그 누가 상상할까. 노래하고 춤추며 신나게 놀 생각만 한다네)”

  아이를 세상에 초대한 건 나지만, 아이가 내게 보여줄 세상이 더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 알겠다. 때론 힘들어도, 아이와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신나게 노는 순간이 내 삶을 더 풍요롭게 해주리라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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