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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 Apr 08. 2023

비틀고 뒤집으며 나아가기

『피노키오는 왜 엄펑소니를 꿀꺽했을까?』,『이상한 나라의 그림 사전』



  제목이 범상치 않은 그림책을 발견했다. 바로 박연철의 『피노키오는 왜 엄펑소니를 꿀꺽했을까?』. ‘엄펑소니’가 뭐지?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호기심에 책을 펼쳤더니 판형도 특이하다. 각 페이지가 모두 연결되어 있어 병풍처럼 줄줄이 펼쳐지는 형태. 한국 민화문자도* 중에서도 사람이 지켜야 할 여덟 가지 도리를 설명한 ‘효제문자도’를 차용했는데, 이집트 벽화, 알프레도 히치콕의 사진, 르네 마그리트와 뱅크시의 작품들, 낯익은 건축물과 픽토그램까지 섞여 있어 그야말로 기발하고 독특한 콜라주 그림책이었다.


  기대에 부응하듯 내용도 온통 반어와 전복투성이. 예를 들면 이런 식. 엄마 잉어의 소원이  맛있는 죽순 한 번 먹어보는 건데, 우연히 요술 부채를 주운 아이 잉어는 소원을 빌어 얻은 죽순을 혼자서 허겁지겁 다 먹어 버린다. 그래놓고 ‘부모가 먹고 싶어 병이 나든 말든 자기 배만 채우는 착한 마음을 효(孝)라고 해.’라는 게 결론. 다음 이야기들도 매일반이다. 형제가 두들겨 맞든 말든 모르는 척하는 착한 마음을 ‘제(悌)’라고 한다거나, 나라가 망하든 말든 제 몸뚱이만 지키는 착한 마음을 ‘충(忠)’이라고 한다거나.


  책 서두에는 히치콕이 내기쟁이 할아버지로 등장한다. 여덟 개의 이야기마다 거짓말이 들어 있는데, 이 거짓말에 속지 않으면 커다란 엄펑소니를 주겠다는 게 내기의 조건. 엄펑소니에 대한 궁금증으로 내기에 뛰어든 독자들은 어렵잖게 거짓말의 실체를 발견하고 기대에 부풀지만, 엄펑소니는 이미 피노키오가 꿀꺽해 버린 상황. 바코드를 연상케 하는, 피노키오의 붉고 네모난 윗옷이 예사롭지 않다. 아나몰포시스*를 통해 피노키오의 윗옷에 숨겨둔 것은 바로 ‘엄펑소니는 의뭉스럽게 남을 속이는 짓을 말해’라는 문장. 앞선 페이지 곳곳에 숨겨져 있던, 기다란 코의 피노키오와는 달리 엄펑소니를 삼킨 피노키오만이 정상적인 코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엄펑소니의 뜻에서만큼은 거짓이 없기 때문 아닐까.


  책 전체가 엄펑소니이자, 아이러니인 셈이다. 중요한 가치들이 희석되고 전복된 세상을 능청스레 비트는 느낌. 예의도 염치도 없이 저만 잘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숨은 욕망을 여지없이 까발린다. 웃기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뜨끔한 이유는, 아닌 걸 알지만 그렇게 해버릴 때가 많은, 그래서 들키고 싶지 않은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므로.


  작가 소개 역시 시선을 사로잡는다. “어느 날, 콧구멍을 파다가 문득 깨달았어요. 이 세상에 참 많은 것이 엄펑소니란 것을.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어요. 나중에 화장실에서 똥을 누다가 문득 또 깨달았지요. 엄펑소니를 엄펑소니가 아니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난 예술가가 되었고 이 책을 만들었답니다.” 엄펑소니, 즉 속임수가 가득한 세상에서 속는 줄도 모르고 속고 있는 우리들. 도처에 깔린 속임수들을 들추어내 무력화할 수 있는 건 다름 아닌 예술이라고, 예술의 쓸모와 힘을 굳게 믿는 자의 말이다. 사실 그런 번뜩이는 깨달음의 순간도 아무에게나 찾아오는 건 아닐 터. 코를 파고 똥을 누는 지극히 일상적인 순간에도 성찰과 통찰의 레이더를 끄지 않아야 가능한 일이겠지.



  전복을 통해 서늘하고 날카로운 메시지를 던지는 그림책이라면, 권정민의 『이상한 나라의 그림 사전』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책은 인간이 동물에게 가하는 여러 행위, 이를 테면 목줄 걸어 산책시키기, 사냥, 동물원 우리에 가두고 관람하기, 곡예 훈련, 생체 실험, 유기 등을 보여주는데, 충격적인 건 인간과 동물의 자리가 서로 뒤바뀌어 있다는 거다. 새장이나 비커에 갇혀 있고 줄에 묶이거나 조련 당하는 인간의 모습은 한없이 무력하고 우울하다. 인간의 자리를 꿰찬 동물들은 그동안 인간이 그러했듯 무심하고 냉담한 얼굴로 제 할 일을 하고 있을 뿐. 익숙한 패턴과 반대되는 정보가 감지되자 불편하기 그지없다. 심지어 기괴하고 섬뜩하기까지. 강자에게는 자연스러운 상황이 약자에게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고, 약자의 자리에 놓였을 때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는 법이라고, 이 책은 말하고 있었다. ‘당연하다’고 여기는 관계나 현상이 실은 임의적이고 편파적인 것이었음을 새삼 깨닫게 됐다.


  최혜진의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에는 권정민 작가가 이 책에 관해 언급한 부분이 나온다. “『이상한 나라의 그림 사전』도 처음엔 인간-동물의 관계 외에 다른 여러 관계를 다루려고 했어요. 남성-여성, 부모-자녀, 고용주-피고용인, 산부인과 의사-산모 등 위계 있는 구도를 뒤집어보는 상상에서 출발했어요. 흔히 입장 바꿔 생각해보라고 하지만, 연습하지 않으면 관성대로 현상을 바라보게 돼요. … 불편함을 느끼기, 입장 바꾸기는 뇌의 저항을 이겨내야 하는 어려운 일이고, 부단한 연습이 필요해요. 그렇게 자리를 바꾸면 새로운 시선이 열려요. 자리를 바꾸어보면 원래 알던 것도 다르게 느껴지고요.” 그래, 어디 인간-동물의 관계뿐이랴. 위계를 뒤집는 상상, 입장 바꿔 불편을 자처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평등한 세상이라는 그럴싸한 엄펑소니에 속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림책이라고 죄다 따뜻하고 아름답기만 할 리 없다. 반어와 전복이라는 충격요법을 통해 세상의 숱한 엄펑소니를 일깨우고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책들, 그 어떤 예술 장르보다 신랄하고 서늘하다. 엄펑소니에 끌려 다니지 않고 차라리 꿀꺽 삼켜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상한 나라의 그림 사전』에 나오는 마지막 단어는 ‘성찰’.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라는 의미와 함께 역시나 의미심장한 그림*이 실려 있다. 거울을 마주하고 선 한 남자의 뒷모습 너머, 거울에 비친 건 다름 아닌 개의 모습. 매일매일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찬찬히 훑다보면 내가 지금 어떤 구조 속에 있는지, 무엇을 잊고 있는지, 어디에 속고 있는지도 더 잘 보이겠지. 또다시 습관처럼 무감해질 때면 그림책을 뒤적이고 예술을 가까이 하면서.


  이제 보니 엄펑소니를 꿀꺽한 피노키오의 얼굴이 바로 박연철 작가의 얼굴이다. 엄펑소니를 엄펑소니로 상대한 작가의 기지에 다시 한 번 박수를 보내며 박연철 만세! (책에 실린 대동여지도에는 朴淵澈萬歲라는 글귀가 숨겨져 있다. 이 넘치는 위트를 어찌하리오.)




* 민화 문자도 : 민간에서 수(壽), 복(福), 용(龍), 호(虎)처럼 상서로운 글자들이나,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처럼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하는 글자들을 그림으로 그려, 집 안에 걸어두거나 병풍으로 만들어 세워두었던 것.


* 아나몰포시스 : 특정한 각도에서 보거나 거울 따위에 비추어 보았을 때 바른 형태로 보이는 왜상 혹은 그러한 현상을 이용한 표현 기법.


* 의미심장한 그림 : 르네 마그리트의 「금지된 재현」을 패러디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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