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막걸리가 알려 줄 거야」리뷰
페르시아어라니, 어지간히 낯설다. 굳이 분류하자면 제2외국어도 못 되는 제3, 4외국어 정도 될 듯한 이 생소한 언어를 배우는 초등학생들이 있다면? 글쎄, 뭔가 배운다는 행위 자체가 무에 문제랴. 내가 감히 짐작지 못한 어떤 동기로 페르시아어를 열성껏 배우는 이들이 왜 없겠냐마는, 늦은 시간 쏟아지는 졸음을 견디며 따분한 표정으로 학원 강의실에 앉아 있는 어린 학생들을 보고 있자니 참으로 눈물겹다. 누가 저 애들을 저기에다 밀어 넣은 거야? ‘페르시아어 전형 대비반’이라니, 하다 하다 페르시아어까지 공부시킨다고?
영화 「막걸리가 알려 줄 거야」 속 주인공 동춘이는 이렇게까지 순종적일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엄마가 짜놓은 학습 플랜을 군말 없이 따른다. 고학년이라고 표현하는 걸 보니 5학년쯤 된 듯한데, 또래보다 작은 키와 젖살이 포동포동한 똥그란 얼굴은 동춘을 더욱 어려 보이게 만든다. 페르시아어 학원에 다니기까지 동춘은 그동안 무엇을 배워왔나. 국영수는 물론이고 태권도, 창의 과학, 모스부호, 코딩, 논술 등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 몽롱한 눈으로 멍때리기를 좋아하는 동춘이지만 애초부터 품고 있던 질문 하나가 있었으니, “이걸 왜 해야 하죠?” 영어 학원 원어민 선생님에게 던진 질문은 ‘학원 등록의 주체’인 엄마에게로, 그래서 엄마에게 가닿은 질문은 다시 ‘영어 전문가’ 원어민 선생님에게로 토스 될 뿐이다. 오갈 데 없는 질문의 행방을 위로하듯 노래 한 곡이 흘러나온다. “질문 대신 문제를 풀어라~ 그러면 시간이 잘 간단다~♬”
자발적 동기에 의한 학습은 아니었지만, 모스부호와 페르시아어에 대한 지식 덕분에 동춘은 비밀 친구를 하나 얻게 된다. 우연히 얻게 된 막걸리가 발효되면서 효소 거품이 터지는 소리를 유심히 듣던 동춘은 소리의 규칙성에서 모스부호를 확인하고 이를 페르시아어로 번역하기에 이른다. 막걸리가 알려 준 번호로 로또 4등에 당첨되기도 하고, 의도치 않게 페르시아어를 잘하게 되면서 말하기 대회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둔다. TV 프로그램 「천재발굴단」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어린이들’ 편에 섭외 제의까지 받은 상황. 하지만 막걸리 통이 엄마에게 발각되면서 동춘은 비밀 친구를 잃게 되고, 부모에 이끌려 상담 센터로 가게 되는데…. 막걸리가 남긴 마지막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센터를 뛰쳐나온 동춘은 동네 곳곳에서 십시일반 막걸리를 모아 생수통에 담은 뒤 버려진 유모차에 태워 달리고 또 달린다. 동춘이 마침내 도착한 곳은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양조장. 그곳에서 막걸리 속 미생물이 알려 주는 진실이란, 두둥. 약 35억 년 전 지구 밖에서 날아온 미생물이 지구의 생물체들을 채집하여 자기 행성으로 데려가는 일을 반복하고 있는데,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적응력이 뛰어난 인간 아이들을 선별하고 있다는 것. “왜 하필 페르시아어야?”라는 동춘의 질문에 미생물은 대답한다. “너희들이 배우기에 가장 어려운 언어이기 때문이지. 적응력을 시험하기 적합하달까.”
동춘은 자신이 받아온 숱한 사교육과 가족, 친구들의 얼굴을 복기하며 마침내 환하게 미소 짓는다. “그래, 정말 이상했어. 그렇지 않고서야 모스부호, 페르시아어, 태권도, 미분, 적분, 영어, 코딩을 초등학생이 배울 리가 없잖아, 그렇지?”
그때 양조장 문이 열리고, 수많은 아이들이 저마다 각기 다른 막걸리 통을 든 채 동춘을 바라보며 반갑게 인사한다. 또 다른 미지의 행성, 미생물의 행성으로 통하는 웜홀―발효통 입구 ―앞에서 한참 고민하던 동춘은 이내 결심한 듯 그 안으로 뛰어든다. 신비로운 우주가 펼쳐지고 얼마간의 유영 후 비로소 나타나는 아름다운 행성 하나.
이렇게 끝나는구나, 했더니 쿠키 영상이 이어진다. 리투아니아의 카우나스라는 도시, 금발의 소녀가 수업 중 따분하다는 듯 창밖을 응시한다. 이윽고 교실을 나오는 소녀의 손에 쥐어진 책 한 권은 바로, 「한국어 첫걸음」. 그 소녀는 동춘이처럼 미생물의 메시지를 수신할 수 있을까. 그리고 역시 그 웜홀 속으로 몸을 던지게 될까.
웃기면서도 슬펐다. 나에게는, 어른들에게는 더없이 황당무계한 이야기로 들리지만, 동춘에게는 그것 이상의 합당한 설명이, 수긍 가는 설득이 없었다는 거니까. 아닌 게 아니라 그 누구도 동춘이에게 속 시원히 말해준 적 없지 않나. 물론 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좋은 대학 나와 좋은 직장 얻어서 풍족하고 안정된 삶을 살기 위해서라는 진부하고 세속적인 대답뿐이었겠지만. 교육과정이 수시로 바뀌는 이유에 대해서도 막걸리는 명쾌하게 답해준다. 지구 밖에 더 나은 세계가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높으신’ 분들이 아이들의 적응력 향상을 위해 철저한 계획하에, 미생물과의 동의하에 교육과정을 홱홱 바꾸고 있는 거라고….
‘왜’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어른들, ‘왜’라는 질문을 단념한 아이들, ‘왜’라는 질문이 거세된 교육 현장. 귀엽고 슬프고 터무니없고 서늘한 영화 한 편이 꽤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혔다. 뚜렷한 이유도, 쓸모도, 목적도 없는 공부가 아이들에게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자발적 열의에 의한 것이라 해도 공부란 본디 지난한 과정이 아닌가. 설사 출발은 주체성에 기초하지 못했더라도, 최소한 아이들이 그 효용성을 납득하는 단계는 충분히 거쳐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고 보니 교사인 나조차도 학생들에게 학교와 학원의 존재 이유, 교육 경쟁의 본질 등에 대해서 질문하기가 두렵다. 아니, 누군가가 나에게 질문을 던질까봐 조마조마하다. 질문을 받은 나는 무어라 답해야 할까. 내 대답이 그들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돌이켜 보면 나는 그 시절 ‘왜?’라는 질문을 했었나. 다행히 ‘왜?’라는 질문에 골몰하지 않았으므로 그 시기를 무탈하게 넘길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치열한 현실 속에서 남보다 풍족하고 안정적으로 살기 위해서임을 혀 아래 숨긴 채 '자기 발전', '자아실현' 같은 바람직하고 기만적인 허울을 내세우기엔 여간 낯간지러운 일이 아니므로. 적어도 내 삶에서 진정한 성장과 발전을 이끈 공부다운 공부는 학교나 학원에서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이 날 더욱 곤란케 한다.
막걸리 통의 정체를 캐묻는 엄마를 보며 동춘은 생각한다. ‘아, 이래서 어른들이 질문을 싫어했구나!’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어른들은 막걸리보다 못하다. 적어도 막걸리가 준 답은 참신하고 흥미진진하고 지구 밖 새로운 행성으로의 여행이라는 엄청난 보상을 보장하는 것이었으니.
영화 속 또 다른 중요 인물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동춘의 엄마는 동춘에게 비장한 얼굴로 말한다. “우리는 지금 이인삼각 경기 중이야.” 출산 전 대기업에서 일하며 연봉 6000까지 찍은, 능력 있는 커리어 우먼이었던 그녀는 아이를 낳은 후 스스로 ‘도태’되었다고 생각해, 극심한 산후 우울증에 시달린다. 그런 그녀를 다시 일으켜 세운 상담사의 한마디. “당신은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요. 바로 아이를 키우는 일이죠.” 그녀는 다짐한다. 동춘을 잘 키워내기로, 그것만이 인생 2막의 가장 중요한 과업이라고. 입시 관련 정보를 다방면으로 수집하고, 아이 성장 속도 체크도 게을리하지 않으며, 독서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려 늘 노력하는 ‘열성 엄마’인 그녀는, 자식을 통해 대리만족하려는 모습은 보일지언정 자애롭고 다정하다. 비슷한 주제의 드라마나 영화에서 으레 등장하는, 왜곡된 모성애의 소유자 혹은 야망의 화신으로서의 엄마가 아니라서 더 현실적이고 애처롭다. 동춘이 다니는 학원 목록을 읊다가 문득 자신을 ‘미친 것 같다’고 진단하면서도, 결론은 ‘선택과 집중’을 위해 이민을 준비하자는 그녀는 좀 더 ‘자유로운 곳’을 희망한다. 글쎄,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 뭐라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현실의 치열함인가, 그녀 자신의 내밀한 욕망인가.
그녀에게서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무엇보다 아이의 의사를 존중하고, 불안한 미래를 담보로 현실의 확고한 행복을 희생하지 않겠노라 다짐하지만, 눈앞의 현실을 핑계 삼아 기본은 해야 하지 않겠냐며 아이 사교육에 80만 원 가까운 돈을 매달 지불하고 있으니까. 좀 힘들어도 학교 공부 따라가려면 학원은 다녀야 할 것 같다는 아이의 말에 내심 안도하며 기특하다 여겼으니까. 더한 엄마들을 보며 안심하고 또 한편 불안해했었으니까.
마지막으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삼촌의 존재. 산동네 오두막에서 ‘변두리 명상가’로, 소위 ‘자연인’의 행색으로 살아가는 동춘의 외삼촌은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이다. 대기업을 다녔고, 기러기 아빠 생활을 오래 했다는 그는 어떤 연유에서인지 속세의 성공과는 매우 먼 삶을 살아간다. 동춘의 엄마가 보내온 대학 졸업장을 미련 없이 불태워 버리는, 한국의 경쟁 교육 현장에서 최정점을 찍었지만 그 결과의 허무함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새처럼 자유롭고 싶다는 바람대로 결국 어디론가 홀연히 떠나버리는 그는, 어쩌면 그간의 삶이 ‘왜?’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진지한 탐색의 과정에 기초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의 떠남은 동춘의 여행과 동일선상에 놓일지도. 그들 각자 자기 자리에서 ‘왜?’를 좇는 여정을 시작했으므로. 부디 막걸리가 전해준 답보다 더 나은 대답을 찾을 수 있기를.
사실 이 영화를 열 살배기 아들과 함께 보는 내내, 난 아이 눈치를 살폈다. 아이는 무엇을 보고 듣고 느낄 것인가. 아이가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기를 바라는가. 적어도 아이가 ‘왜?’라는 질문을 거리낌 없이 던지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타인에게든 자신에게든 이 사회와 시스템을 향해서든 이게 맞는 거냐고, 이게 무얼 위한 거냐고 묻고 또 묻기를. 그 끝에 명확한 답이 기다리고 있지 않더라도 끝없는 질문은 삶을 추동할 에너지가 되어 줄 테니.
지금 당장 막걸리처럼 명쾌하고 재미난 답을 전해주지 못해 무던히 애석하지만 그래서 더욱이 함께 고민해 보자고, 엄마 혼자 고민하려니 너무 어려워서 네 도움이 필요하다 했더니 아이가 물었다. “엄마, 근데 왜 미리 물어보지도 않고 영화표를 끊어 놓은 거야? 난 그냥 집에서 뒹굴뒹굴하고 싶었는데.” 앗,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요즘 들어 가뜩이나 고분고분하지 않은 아들과 마찰 빈도가 늘고 있는데, 이제 더더욱 사사건건 묻고 따지고 들 텐데, 어떻게 대처해야 현명한 어른이 되려나. 아무렴, 막걸리보다 못한 부모, 막걸리보다 못한 교사는 되지 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