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로의 메이저 아르카나 스물두 장 가운데 아홉 번째는 ‘은둔자’ 카드다. 설산 위에 홀로 서서 긴 막대기에 의지한 채 등불을 든 수도자의 모습이 보인다. 눈과 귀를 닫고 세상을 등진 듯하지만, 길 잃은 이들을 위해 빛을 밝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고독과 침잠, 탐구와 깨달음이 이 카드의 핵심 키워드다. 나의 탄생 카드이자 영혼 카드가 바로 ‘은둔자’다. 이 카드는 나의 재능과 본성, 자원을 의미하는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품고 있다.
평생을 학교에서 보냈다는 사실은 내 삶을 요약하는 한 문장이다. 초·중·고를 지나 대학을 거쳐 다시 교사가 되어 교실에서 아이들과 부대끼며 산 세월까지, 내 인생의 대부분은 책상과 칠판, 종소리와 함께 흘러갔다. 비단 나만 그랬던 것은 아닐 테지만, 학창시절의 공부는 즐거움이나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해야 하니까 했고, 달리 할 수 있는 게 마땅치 않았기에 점수와 순위로 나를 증명하고 인정받으려 무던히 애썼다. 다행히 드문드문 찾아오는 성취감으로 한 시절을 버텼다.
대학에 들어가면 달라질 줄 알았다. 그야말로 대학(大學)이지 않은가. 큰 배움의 세계가 내 앞에 펼쳐지길 기대했다. 그러나 대학 공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선다형에서 서논술형으로 바뀌었을 뿐 시험과 학점을 위한 공부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고, 내신과 수능 대신 졸업과 임용 고시로 인한 압박이 나를 옭아맸다. 자발적 탐구, 배움의 기쁨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여전히 묘연했다.
교사가 되고 나서는 또 다른 모순에 직면했다. 정작 나 자신도 공부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모른 채 학생들에게 줄곧 공부를 강요해야 했다.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공부’라는 말이 진실하지 못해서 나는 종종 부끄러웠다. 때로는 나 자신이, 대학으로 가는 정거장에서 학생들을 각기 다른 열차에 실어 보내는 역무원 같았다. 학창시절 미처 깨닫지 못한 시스템의 한계가 이제야 선명해졌지만, 내게는 그걸 바꿀 힘이 없었다. 되려 체제의 톱니바퀴가 되었다는 사실에 자주 회의했다. 학교에서 말하는 공부가 한없이 좁고 가볍고 불순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몇 년 전 휴직을 하면서 처음 학교 바깥으로 발을 내딛었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내 인생의 진짜 공부가 시작되었다. 철학 스터디 모임에서 니체를 읽고 발제도 하고 토론에 참여하며 삶을 이끄는 문장의 힘을 체감했다. 시집 읽기 모임에서는 교과서 밖 날것의 시들을 접하며 분석 대신 몰입을 경험했다. 시 창작 모임에 나가 시론을 공부하며 언어 감각을 벼리고, 새삼 그림책에 빠져서는 그림책의 예술적 가치에 깊이 공감했다. 저마다 다른 궤적을 지닌 사람들을 글쓰기 모임에서 만나며 그냥 사는 사람은 없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시험도 성적도 비교도 강요도 없는 자리에서 공부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배우는 과정 자체가 벅찬 기쁨이 되었다.
타로에 이어 사주(四柱) 이야기도 좀 하자면, 내 사주에는 물이 부족하다. 일간(日干), 곧 태어난 날의 천간(天干)은 그 사람의 기질과 삶의 방향을 드러내는데, 나는 갑목(甲木), 즉 큰 나무다. 초봄의 언 땅을 뚫고 위로 솟구치려는 나무에 물이 부족하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물은 여러 의미를 지니지만, 지식과 지혜, 정보의 흐름을 뜻하기도 한다. 모자라는 건 곧 갈증이 된다. 그래서일까. 나는 늘 목마른 사람처럼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어 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하는 공부만이 나를 채워주었다. 나무가 물을 만나야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듯, 내 삶에서 공부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결핍이 나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했고, 그 갈증이 곧 나의 동력이 되었다.
꽤 오랜 시간 학교에 머물며, 부족한 깜냥으로 가르치는 흉내만 내는 것 같아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다시 학교로 돌아온 지 오래지 않아, 나는 금세 갑갑증을 느끼고 또 탈출을 감행했다. 그래서 요즘은 교과서 대신 각종 정책 문서와 보도 자료, 학술 논문에 파묻혀 '이슈페이퍼'라는 걸 쓰느라고 용쓰는 중이다. 학교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갑갑한 교육청에서. 이것도 공부라면 또 공부겠지만.
잠시 학교를 떠난 지금, 은둔자의 등불은 다시 내 안을 비추고 있다. 이 빛이 결국 나만의 공부로 끝날지 아니면 언젠가 다른 누군가를 비출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나는 여전히 무언가를 공부 중이고, 앞으로도 계속 공부를 해야 할 거라는 사실이다. 은둔자가 끝내 의지하고 선 것은 긴 나무 막대기다. 사주가 일러주듯 나는 나무, 그것도 늘 물을 찾아 헤매는 목마른 나무다. 내 등불을 지탱하는 힘도, 내 걸음을 밀어내는 갈증도, 결국 나 자신에게서 비롯된다. 오늘도 나는 목마른 자로서 작은 등불 하나 들고 배우는 길 위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