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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일걸즈 Dec 03. 2020

세르비아의 여름 上

Part 2. 외톨이 어드벤처

벨리카 플라나 이야기


첫 만남 때부터 J는 그의 눈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연하늘색 눈이 가장 반짝거리며 빛나는 순간은 그가 자신의 꿈을 이야기할 때였다. 코가 시큰거릴 정도로 독한 연기를 내뿜는 담배를 들고 까아만 머리카락을 대충 올려묶은 채, 그는 낯선 유랑객들에게 하루에도 몇 번이고 꿈 얘기를 들려주었다.

작은 버스를 하나 살 거야. 그리고 그 버스에 내 강아지들을 모두 싣고 떠날 거야. 이곳저곳을 떠돌다 마다가스카르에 도착하면, 바오밥 나무를 있는 힘껏 껴안을 거야.

그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아들였다. 먼 곳을 바라보는 눈은 이미 꿈의 어딘가로 떠나있었다. 이야기를 듣던 유랑객 J와 M이 함께 그 꿈으로 떠나려던 찰나, 그의 아들이 부루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엄마, 바오밥 나무는 엄마 혼자 껴안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사람이 열 명 넘게 손을 잡아야 그 나무를 두를 수 있을까 말까라니까요? 너희도 바오밥 나무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지?

그들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역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옅은 웃음을 비쳤다. 재떨이 위에 앉은 담배가 빠른 속도로 타들어 갔다. J는 그대로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름이 오기 바로 직전의 어느 날, J와 M은 베오그라드 고속도로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들은 찢어진 박스 한쪽을 들고 있었는데 박스에는 ‘VELIKA PLANA’라는 글씨가 큼지막하게 적혀있었다. 그들은 전날 만난 스코틀랜드 히치하이커들에게 조언을 얻어 히치하이크를 시도하는 중이었다.

M은 차가 씽씽 달리는 곳에서 아슬아슬하게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어찌어찌 표지판도 만들어 고속도로까지 오긴 했지만, J는 솔직히 조금 부끄러웠다. 도로를 쌩하니 달려가는 운전자 중에는 더러 검지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까딱 흔드는 사람도 있었다. J에게 그건 마치 “여기서 히치하이크를? 정말 막무가내로군!”이라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든 채 열심히 손을 흔드는 M의 주변을 강아지처럼 맴돌기만 했다. 더구나 시간이 흘러도 그들을 태우겠다는 운전자는 쉬이 나타나지 않았다. J는 초조해졌다. 그날 안에 차를 얻어 탈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들을 초대한 친구에게 언제 도착할지 잘 모르겠다는 메시지를 쓰고 지우길 반복했다.


고속도로에서 40분가량을 서 있었을 때, 차 한 대가 멈추어 섰다. J와 M은 환호성을 지르며 무려 쌀 한 가마니 무게의 배낭을 들고 차를 향해 달려갔다. 그들을 태워준 이는 40대 초반의 알바니아 사람이었다. 운전자는 J와 M 같은 히치하이커를 수도 없이 태웠다며 서툰 영어로 말했다. 깔끔하게 민 머리, 까만 선글라스, 그리고 근육이 붙어 우람한 팔에는 까맣고 촘촘히 덮은 타투가 있었다. J는 혹시 그가 엉뚱한 곳으로 그들을 납치해가진 않을지 걱정하다 타투가 많은 자신의 친구들을 떠올리며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벨리카 플라나로 가는 길목은 딱 한 번의 맥도날드 표지판을 제외하고는 모두 초록색 들판이었다. J가 이제껏 보았던 인도의 풍경과는 확연히 달랐고, 생경했다. 달리는 차 안에서 바라보는 들판은 아주 평화로웠다. 알바니아를 거쳐 세르비아, 보스니아로 향한다는 운전자의 여정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그들은 마을의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성지윤

아담 밀렌코비치. 그의 고향 마을 벨리카 플라나는 베오그라드에서 조금 떨어져 있다. 세르비아의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오렌지빛 지붕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들을 지나칠 수 있는데, 벨리카 플라나 역시 그러한 마을 중 하나이다.

아담의 집은 마을의 중심가에서 꽤 떨어진 언덕 위에 있다. 체리나무와 호두나무가 있는 작은 마당 뒤에는 텃밭이, 작은 집에는 아담과 그의 어머니 고리차, 열 마리의 강아지와 한 마리의 고양이가 함께 산다. 거실 한구석에는 <내셔널 지오그래픽>만 365일 틀어놓는 텔레비전이 한 대, 그 옆 테이블에는 고리차가 목걸이를 만들 때 사용하는 와이어들이 늘어져 있다. 낡은 소파에서는 종종 다섯 마리의 작고 늙은 갈색 강아지들이 요란하게 코를 골며 잠을 잔다.

아담은 밴드에서 피아노와 기타를 연주하는 음악가이자 온라인 영어 강사이기도 하다. 여름날 아담의 하루는 주로 오후 열두 시에서 한 시에 시작된다. 느지막이 일어난 그는 커피에 설탕을 듬뿍 타고 잎담배를 말아 한껏 핀 다음 고리차의 방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평소보다 한 톤 높은 아담의 목소리가 들리면 그가 한창 수업 중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조율이 살짝 풀린 피아노의 멋들어진 건반 소리는 아담의 쉬는 시간을 알린다.


전등이 고장 나 밤에는 앞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오르면 방이 세 개가 있다. 첫 번째 방은 아담의 할아버지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오면 머무는 방, 두 번째 방은 아담의 방, 세 번째 방은 옷가지와 고리차가 아끼는 자갈들을 보관하는 방이다.

아담의 방엔 기타 세 개와 전자피아노가 한 대 있다. 방 밖 작은 테라스에는 고리차가 아끼는 화분이 가득하다. 테라스는 아담이 집에 온 손님을 확인하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한다. 주된 손님들은 그의 친구들인데, 그들은 별다른 연락 없이 맥주를 가득 담은 비닐봉지를 들고 아담의 집에 찾아온다. 마당에서 개들이 컹컹거리며 짖으면 아담은 테라스 문을 연다. 그리고 씨익 웃으며 거칠지만 다정한 욕으로 친구들을 반긴다.

친구들이 그의 집으로 찾아오지 않는 날에 아담은 일을 마치고 메신저 앱을 켠다. 그리고 누구에게든 메시지를 보낸다. 모일 수 있는 친구가 늘 한 명쯤은 있다. 그들은 주로 ‘로컬 44’라는 술집에서 당구를 치거나 서로의 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공원에 모여 새벽까지 왁자지껄 떠든다.


J는 난생처음 보는 마을의 형태에 길을 걸으며 고개를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그는 마을을 보고 90년대 미국 드라마 <길모어 걸스>를 떠올렸고, M은 게임 <심즈>와 애니메이션 <심슨>을 떠올렸다.

걸어서 한 시간이면 마을의 끝과 끝을 오갈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곳이야. 아주 지루하지.


아담이 말했다. 보오오어어링. 축 늘어뜨린 몸짓과 표정에서 지루함이 뚝뚝 녹아내렸다. 그는 어떤 우울함을 특유의 표정과 어투로 재밌게 표현하는 재주가 있었는데, J와 M은 그의 그런 점을 아주 좋아했다. M은 다른 친구들에게 그의 유머를 들려주길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그들을 웃기는 데에는 실패했다. 전혀 재미있지 않은 것들을 웃기게 만드는 건 아담만의 특별한 재능임이 틀림없었다.


J와 M이 처음 만난 아담의 친구는 연극배우이자 드라마 클럽 학생들을 가르치는 스테반 요바노비치였다. 모두가 그를 스테바라고 불렀다. 키가 크고 마른 스테바가 길을 걸을 때면 휘적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큰 보폭에 몸이 위아래로 잘게 흔들리면 그의 고불거리는 긴 머리카락이 걸음걸이에 맞춰 찰랑거렸다.

만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아. J가 말했다. 연극배우여서 그런가. M이 덧붙였다. 과장된 몸짓과 함께 각종 이야기를 쏟아내는 스테바는 마치 만화 캐릭터 같았다. 큰 목소리와 특유의 억양을 듣고 있노라면 그가 셰익스피어의 한 구절을 읽는 것처럼 들렸다.

J가 스테바를 만날 무렵 그의 꿈은 미국으로 떠나 유람선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스테바는 미국의 유람선 일이 돈을 벌기에 아주 좋다고 말했다. 그는 세르비아 청년들이 미국이나 독일처럼 돈을 더 잘 벌 수 있는 국가로 가길 원한다고 덧붙였다.

세르비아에는 미래가 없어.


그 말은 문장 자체로는 아주 서글펐지만 말을 하는 사람에겐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었다. 스테바는 그것이 아주 당연한 사실인 것처럼 시큰둥하게 말했다. 아담이 옆에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J도 그 이야기를 덤덤하게 들었다. 그 말이 그들 사이에서 수천 번이고 오간 말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모두가 알고 있고 숱하게 사용해서 이미 닳아버린 말이었다. 말의 다른 요소들은 사라지고 소리만 남은 말이었다. J는 스테바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고향 땅을 생각했다. 고향을 지옥이라 칭하는 단어와 함께 고향을 비난하던 친구들, 그리고 고향을 떠나는 또래 청년들을 생각했다. 내가 사는 이곳에는 미래가 없어. 스테바의 닳고 닳은 기분을 알 것 같았다.

©성지윤

그 무렵 M은 크로아티아로 떠났다. J는 세르비아에 남았다. 그는 M을 크로아티아 행 버스에 태우며 눈물을 찔끔 흘렸다. J는 혼자 여행을 이어나가는 게 꽤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 힘을 얻는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여행에서 용기의 반절은 모두 M으로부터 나왔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기에 더욱 겁이 났다. M이 떠난 이상 앞으로 나머지 용기의 반절을 스스로 채워야 했다.

할 수 있을까. J는 생각했다. 그는 한동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기 싫은 그 기분을 싫어했다. J는 외로웠고 자주 슬퍼졌다. 그는 긴 여행 중 처음으로 집에 돌아가고 싶어졌다.


너무 무기력해 침대 밑으로 몸이 꺼져가던 어느 날, J는 작은 배낭에 짐을 챙겨 다른 도시로 여행을 훌쩍 떠났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라는 말을 중얼거리는 그의 표정이 다부졌다. J는 홀로 버스 티켓을 끊고 호스텔 파티에 참석하고 하염없이 길을 걷고 레스토랑의 넓은 식탁에 혼자 앉아 밥을 먹었다. 밤에는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달콤한 초코아이스크림을 맛보다, 우연히 만난 노인들과 유쾌히 수다를 떨었다. 어떤 날은 강으로 가서 수영을 하고 맥주를 마셨다. 한참을 그렇게 놀다 혼자 수영하는 것이 재미있다는 사실에 흠칫 놀라기도 했다.


며칠은 산으로 갔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보이는 보스니아를 구경했다. 숨을 쌕쌕거리며 굽이진 산길을 오르다 산골 마을 사람들을 만났다. J가 걷는 길 위로는 양 떼가 방울을 딸랑이며 지나갔고 그의 앞에서는 두건을 쓴 할머니가 소를 몰았다. 낮에는 호수에서 강아지와 수영을 했고 밤에는 별과 은하수 구경을 했다. 하늘이 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밤이었다.

혼자 하는 여행이 심심해질 때면 거리에서 동행자를 찾았다. J처럼 홀로 이곳저곳을 누비는 여행자들이었다. J는 그들과 함께 시장에서 장을 보고 식당에서 음식을 나눠 먹고 한두 시간 강가에서 수다를 떨다 홀로, 그러나 경쾌히 숙소로 돌아왔다. 모두 J의 선택으로 만들어진, 낯설지만 기분 좋게 잔잔한 여행이었다.


여행을 하지 않을 때나 M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질 때, 혹은 특별한 일이 없을 때에도 J는 벨리카 플라나 친구들을 만났다. 산책을 하다 마주친 이와 짧은 수다를 떨었고, 우연히 만나 친해진 친구의 집에 초대받아 저녁을 먹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주로는 아담의 집에서 음악을 듣거나 함께 악기를 연주했고 늦은 오후 거절하지 못한 커피를 마시며 고리차와 이야기를 나눴다.

날이 어둑해지면 J는 그들과 밖으로 나갔다. 어떤 밤엔 인근 산에서 맥주를 마시며 별구경을 했고 어떤 새벽엔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세븐’이라는 세르비아식 카드 게임을 즐겼다. 그런 순간들 속에서 J는 외로움 따윈 모두 잊을 수 있었다. 그들 일상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어 기뻤다.

下편에서 계속

©성지윤
글 옥의진(유랑), 사진 성지윤(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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