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메일걸즈 Dec 07. 2020

세르비아의 여름 下

Part 2. 외톨이 어드벤처

고리차 밀렌코비치 이야기


6월의 세르비아는 무더웠다. 비바람에 큰 나무들이 부러지는 날과, 묵직한 햇빛이 걷는 이의 어깨를 짓누르던 날들이 반복되었다. 높은 온도에 새벽녘에도 숨을 쌕쌕 몰아쉬며 길을 걸어야 했다. 더위를 참지 못한 이들은 길거리에서 웃통을 시원하게 벗어 던졌다.

세르비아에 본격적인 여름이 찾아온 후 고리차는 텃밭을 쉬이 가꾸지 못했다. 낮엔 햇빛이 타들어 가리만치 뜨거웠고 해가 지면 모기가 기승을 부렸기 때문이다. 밭일을 피할 수 없는 날에는 해가 떨어질 즈음 밖으로 나갔다. 모기떼가 그녀 주위를 윙윙 맴돌면 고리차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담배를 피우면 모기가 잠시나마 사라졌다.


밭일을 마치고 돌아온 고리차의 긴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헝클어져 낡은 티셔츠 위로 흘러내렸다. 그는 흙이 잔뜩 묻은 장갑과 등산화를 현관 앞에 내려두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땀을 개운히 씻어 낸 후 부엌으로 가서 텃밭에서 캔 채소를 씻었다. 고리차의 부엌은 늘 맛 좋은 냄새로 가득했다. 윙윙 돌아가는 오븐에서는 콩이나 파프리카 같은 것들이 익어갔고 늦은 아침엔 터키식 커피가 보글보글 끓으며 하루 시작을 알렸다. 그는 피자를 만들고 마당에서 딴 체리로 파이를 구웠다. 콩과 채소에 파프리카 가루를 넣어 끓이고 샐러드에 요거트를 넣어 버무렸다. 모든 요리는 고리차가 고안해 낸 특별 레시피였다. 그는 아주 뛰어난 요리사였다.

고리차는 온갖 채소와 허브에도 아주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식물을 지칭할 때도 그것(It)이 아닌 그(He)나 그녀(She)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자연을 친구처럼 여기며, 하얀 늑대개 세 마리를 옆에 거느리고 있는 그를 보면 일본 애니메이션 <원령공주>가 절로 떠올랐다.


J는 고리차가 일을 할 때면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는 고리차가 약초를 설명해주는 모습, 사다리에 올라 체리를 따는 모습, 부엌에서 고리차만의 실험적인 요리를 선보이는 모습이 좋았다. J의 벨리카 플라나 일상 가운데에는 고리차가 있었다. 그는 고리차를 매일 같이 찾아갔다. 그들의 대화는 주로 각자의 평범한 삶에 대한 것으로 시작해 정치, 역사, 경제와 같은 진지한 주제를 거쳐 여행 이야기로 끝났다.

©성지윤

고리차는 J를 세상에서 온 사람이라 불렀다. 그건 마을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들은 어떤 이야기를 시작할 때나 이야기 중간 즈음에 J가 세상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짚고 넘어갔다. 세상에서 온 J. 그 말은 조금 부끄러웠지만 듣기엔 기분이 좋았다. J는 영화 <반지의 제왕> 속 마법사 간달프나 호빗 빌보 배긴스 차림새의 자신을 상상했다. 그 모습은 꽤 멋있었다. 세상에서 온 사람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말인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굳이 아니라고 발뺌하지도 않았다. 그리 불러주니 그런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고리차는 J에게 자신의 여행기를 들려주었다. J는 그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했다. 그 여행기는 고리차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었지만 겪은 것보다 더 자세히 상상한 덕에 생생한 질감으로 다가왔다. 이야기를 할 때 고리차는 한쪽 다리를 살짝 꼬았다. 거만하기보다 편안한 자세였다. 이야기에 곁들이는 와인은 좀처럼 줄지 않았다. J만 잔을 홀짝홀짝 들이켰다. 그러면 고리차는 방의 어딘가, 혹은 꿈의 어딘가를 바라보다 웃음 띤 입을 열었다.


내게도 여행 리스트가 있어. 사진으로 본 도시, 아름답다는 얘길 들은 나라, 내가 가수로 일했을 때 밴드 멤버들과 순회공연 갔던 곳들을 모두 적어 놓았어. 예전에 몬테네그로에 간 적이 있거든. 헤르체고 노비라는 작은 도시였어. 바다가 있는 곳인데 해변에 굴러다니는 돌도 얼마나 예뻤는지 몰라. 저녁에는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고 낮에는 길거리를 걷다 카페에 들어갔어. 그리고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종일 앉아있는 거야.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도 하고 맑은 날씨도 즐기면서.


고리차가 말을 잠시 멈추었다. 고리차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J는 몽롱해졌다. 그는 이야기를 들으며 지금보다 더 젊은 고리차가 해변을 따라 걸으며 돌을 줍는 모습을 상상했다. 노천카페에서 햇볕을 쬐는 고리차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언젠가는 꼭 떠나고 말 거야. 작은 버스를 사서 나의 개들을 위한 자리를 만들 거야.


안에 작은 부엌도 놓으면 좋겠네요! 마치 캠핑카처럼 말이에요.

J가 맞장구쳤다.


그래, 맞아. 그렇게 아주 최소한의 것들만 버스에 담아서 나는 떠날 거야. 어디로 갈지는 몰라. 버려진 마을이 있다면 그곳에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아. 그런 마을의 집을 하나 얻어서 살고 싶어. 잠시 머물다 여행을 이어갈 거야. 마지막 목적지는 마다가스카르야. 그곳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온 힘을 다해 바오밥 나무를 껴안는 거야.


고리차는 자신이 버스를 사는 날 J와 M을 부르겠다고 했다. 같이 여행을 떠나자고 말했다. J는 그날이 오길 기다리겠다고 했다. 고리차와 함께 하는 여행은 정말 멋질 것 같았다.


J는 고리차처럼 늙고 싶었다. 그처럼 꿈에 바오밥 나무 한 그루쯤 심은 채 살아가고 싶었다. 고리차의 바오밥 나무는 거대하고 단단해 보였다. 아주 오랫동안 꾸었던 꿈이라 그런지 뿌리도 깊어 그녀의 삶을 잘 지탱하고 있는 것 같았다. J는 자신의 바오밥 나무의 크기는 얼마나 될지, 또 어떤 모양새로 키워나갈지 가늠해보았다.

고리차의 웃음이 흐릿해지고 담배가 전부 재가 되면 이야기는 끝이 나고 그는 현실로 돌아왔다. 여행 외에 고리차가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그의 집에 있었다. 하얀색 검은색의 토마토와 마당의 체리 나무와 옆을 지켜주는 듬직한 강아지들 모두 고리차의 사랑을 듬뿍 받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고리차가 바오밥 나무를 향해 당장 떠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고리차는 커피를 끓이고 요리를 시작했다. 밥을 먹은 후엔 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해야 했다. 화장실 욕조와 변기도 꼼꼼히 닦았다. 소파와 바닥에 개털이 휘날려 매일 바닥을 쓸고 닦는 것도 일이었다. 장터에서 장을 보고 텃밭을 가꾸고 벽에 페인트칠하는 일 등 그는 매일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그 일들은 고리차를 종종 우울하게 만들었다. 바오밥 나무를 향해 달려가는 고리차는 사라지고 아담의 엄마와 동물들의 보호자만 남게 되는 순간이었다.

©성지윤

7월이 되고 더위는 더 지독해졌다. 습기와 태양은 텃밭의 채소들을 죽였다. 이건 재앙이야, 라는 말을 고리차는 입에 달고 살았다. 모아둔 돈이 떨어져 예전만큼 식재료를 풍족히 살 수도 없었다. 그의 노랫소리는 확연히 줄었고 대신 평소보다 더 많은 담배를 피웠다.

그런 때에 고리차의 꿈은 흔들렸다. 그는 자신이 죽기 전에 정말로 바오밥 나무를 보러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그간 J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모두 헛된 것처럼 읊조렸다.


내가 더 젊었다면 너처럼 여행을 떠났을 텐데. 지금 나는 너무 늙고 지쳤어. 우리 세르비아 사람들은 너무 어리석어. 어딘가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잖아. 마치 이곳이 우리 삶의 전부인 것처럼 말이야. 물론 그만큼의 돈도 여유도 없지. 여긴 감옥 같아. 우린 감옥에 갇힌 죄수야.

 

그날도 여느 때처럼 J는 고리차를 찾아갔다. 대낮에 높은 언덕길을 오른 J도, 집 안의 강아지들도 더위에 헥헥거렸다. 고리차는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 그는 머그잔에 따뜻한 베리 차를 따라 J에게 건네며 말했다.


있지. 오늘 이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어. 전화를 끊고 나니 문득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했어.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그런데 네가 떠올랐어. 어쩌면 너처럼 사는 게 정말 살아있는 거 아닐까. 세상을 사는 것, 세계를 사는 것 말이야. 그게 인간이 살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삶 아닐까.


J는 고리차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었다. 이야기를 듣고 숨을 잠시 멈췄던 것도 같다. J는 고리차의 말이 의심스러웠다. 그 의심은 고리차가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세상에서 온 J. 그는 그 말을 속으로 여러 번 곱씹었다. 그 호칭엔 J가 여행자라는 것 외의 의미가 담겨있었다. 고리차를 포함한 사람들은 마치 그들의 세상과 J의 세상이 다르다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들 자신은 세계 밖에 동 떨어져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사람들은 J를 부러워했다. 용감하다며 칭찬했다. 그리고 자신은 절대 J처럼 살지 못할 거라며 자신의 삶을 한탄했다.


언젠가 J처럼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이들도 있었다. J 또래의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J에게 감명을 받았다며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 말에 J는 마음이 따뜻해지면서도 부끄러웠다. J가 볼 때 자신의 여행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멋지지 않았다. J의 삶 역시 그 누구보다 나은 점 하나 없었다. 그들이 부르는 대로 세상에서 온 사람인 척 하는 건 애초에 그만두는 게 맞았다. J는 세계를 사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고 깊이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자신이 잘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더더욱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J는 고리차의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세르비아를 떠나 불가리아로, 불가리아에서 네덜란드로, 다시 독일로 J의 여행은 계속되었다. 아담과 스테바는 J에게 잘 지낸다는 소식을 전했다. 핸드폰 화면 속 테이블 위엔 언제나처럼 잎담배와 재떨이가 어질러져 있었고 그들의 머리는 한층 더 길어 있었다. 벨리카 플라나는 늘 똑같아, 라고 말하는 목소리와 표정 모두 변함없었다.


너는 세상에서 온 사람이잖니.


아담의 얼굴을 보니 자신에게 조곤조곤 이야기를 건네던 고리차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고리차에게 세계를 사는 것은 여행이었다. 정처 없이 떠돌고 머무는 생활을 반복하는 삶. 그래서 여행자 J를 세상에서 온 사람이라 불렀던 걸지도 몰랐다.

J는 세계를 산다는 게 무엇인지 여태 알 수 없었다. 한동안 그 의미를 찾아 헤맬 것 같았다. 어쩌면 자신만의 바오밥 나무를 껴안는 날 그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바람에 발코니 문이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가을의 베를린은 마치 여름이 없었던 듯 갑작스레 찾아왔다. 가로수는 하나둘 이파리를 떨구었고 사람들은 스카프를 두르고 카디건을 입었다. J 역시 검은 목폴라 티를 입고 외출한 참이었다. 이어폰에서는 애니메이션 <마녀 배달부 키키>의 OST가 흘러나왔다. 그는 지브리 스튜디오 영화를 좋아하는 고리차를 떠올렸다. 세르비아를 떠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사소한 순간 속에 그들이 생각나곤 했다. 어쨌건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삶과 여행을 이어나가고 있어 다행이라고, J는 생각했다.


발갛게 익은 체리, 아릿한 담배 냄새, 샛별, 피아노 건반 두드리는 소리 같은 것들이 담겨있는. 느슨하고 뜨거운 세르비아의 작은 마을 벨리카 플라나의 여름이었다.

©성지윤
글 옥의진(유랑), 사진 성지윤(찌루)
작가의 이전글 세르비아의 여름 上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