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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는 대로만 하라고요, 쫌!

은퇴 부부의 동거일기

by 연글연글



작년 여름, 손녀 방학 때의 일이다.
딸 부부가 출근하기 전에 나는 딸네 집으로 가서, 손녀가 일어나면 아침을 챙겨 먹이고 종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딸이 퇴근해서 돌아오면, 그제야 나도 우리 집으로 돌아가 해방이 되곤 했다.

손녀의 방학은 2주였는데, 여름이라 덥고 습했다.

하루 종일 집 안에서만 붙어 있다 보면 저녁 무렵에는 물먹은 하마처럼 축 늘어지고, 기분까지 비틀어 짜면 물이 나올 것 같은 상태가 된다.

​손녀는 바람 쐬러 나가자고 해도 싫다 하고, 집에서 노는 걸 더 좋아했다. 그러니, 종일 집 안에서 둘이 보내는 한여름의 하루가 어땠을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방학 2주는 길다고 할 수도, 짧다고 할 수도 없는, 참으로 사람이 짜증 나기 딱 좋은 기간이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손녀와 함께여도, 습도에 약한 갱년기 할미에게 여름은 참으로 잔인하다.
손녀를 씻기고 나오면, 욕실의 습기를 머금은 내 반곱슬머리가 제멋대로 부풀어 오르고 사방으로 뻗친다.
그 모습을 본 손녀는 한마디 한다.

“할미 머리, 아인슈타인 같아.”

오늘도 뼈를 맞는다.

​방학이 끝나갈 무렵, 마침 캐나다 동생 집에 놀러 갔던 할아버지가 돌아왔다.

역시나 아침부터 손녀에게 붙잡혀 있던 나는, '남타커' 한 잔이 간절했다.
아직 8시도 되지 않은 이른 아침이라, 동네에서 문을 연 카페는 스타벅스뿐이었다.

나는 라떼를 좋아하지만, 스벅의 라떼는 너무 싱거워서 내 취향이 아니다.

그런데 ‘플랫 화이트’에는 샷이 3개가 들어간단다. 그래서 커피 향이 느껴진다.
그래서 스벅에서는 늘 플랫 화이트를 마신다.

​문제는, 이 커피 주문이 좀 길다는 것.

평소에도 패스트푸드점이나 카페에서 주문은 늘 내 몫이다.

그래서 커피를 사다 준다는 할아버지가 못 미더워, 포스트잇에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건넸다.

​'플랫 화이트 숏 사이즈, 바닐라 시럽 빼고요.'

그리고는, 꼭 이대로 주문하라고 당부까지 해서 보냈다.

그런데 말을 잘 들으면 하라방이 아니지.
캐나다에서 놀다가 막 돌아온 할아버지는, 스타벅스에 가서 호기롭게 캐나다 식으로 외쳤단다.

​“원 숏 플랫화이트, 시럽 빼고요~”





그리하여 할아버지가 손에 들고 온 그 커피는,

내가 원하던 진한 향의 커피가 아닌,

샷이 하나만 들어간 흐릿한 우유빛깔의 커피.


숏을 샷으로 들은 매니저가

원 샷을 넣어달라는 줄 알고 커피를 저렇게 만들어 주었다.

​아, 아침부터 화가 난다.

​그래. 사랑하는 손녀도, 말을 안 듣는 하라방도, 이 잔인한 여름도, 결국엔 내가 감당할 몫이다.
그렇다고 커피까지 망해버리면 나는 어쩌라고.

​"하라는 대로만 하라고요, 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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