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나의 힘
내게는 푸바오랑 몸무게로 친구 먹는 두 조카가 있다.
지금은 성인이 되었고 호주에서 살고 있는데
우리 집 기록상 가장 무거운 몸무게를 찍은 주인공들이기도 하다.
뷔페에 데려가면 본전이 아깝지 않은, 유일한 존재들이다.
배를 든든히 채우고 나면
알차게 후식까지 챙겨 먹는다.
특히 소프트 아이스크림은 무려 20센티나 높이 쌓아 올려서는,
마치 임금님의 수라상을 받들고 오는 상궁들처럼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두 손으로 공손히 받쳐 들고
사뿐사뿐 걸어와 맛있게 싹싹 비우는 녀석들이다.
몸무게랑 순수함은 아무 상관이 없는 건지,
살집이 없는 우리 손녀도 천진난만함엔 커트라인이 없고, 푸바오랑 맞먹는 두 조카도 순수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서 스무 살 이상 차이가 나는데도, 셋이 모이면 그야말로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
노는 모양새도,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도, 순수함의 레벨도 찰떡같이 잘 어울린다.
보고 있는 우리까지 덩달아 배꼽을 잡고 웃게 된다.
나는 세상에서 ‘엄마’만큼이나 정겨운 이름이 ‘이모’라고 믿는다.
우리 아이들이나 조카들에게 이모가 곁에 있다는 건,
생각할수록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아이들이 어릴 때,
'딸딸 맘'인 나와 '들들 맘'인 여동생은
공동 육아라는 차원에서 참 많이도 어울려 다녔다.
조카 녀석들은 또래 사내아이들보다 한결 온순했고,
내가 아는 남자아이들 중 단연 제일 착했다.
우리 큰딸은, 6살 차이가 나는 막내 사촌 동생의 백일 사진을 코팅해 책받침으로 만들어 학교에까지 들고 다녔다.
사촌 동생들을 만나기만 하면, 친동생은 뒷전으로 밀어 두고 사촌 동생들을 꼭 품에 안고 다니며 예뻐했다.
언니에게 밀려 심통이 난 작은딸은,
은근슬쩍 동생들을 괴롭히며 분풀이를 하곤 했다.
그럴 때에도, 조카들은 한 살 차이 누나의 심술에도 꼼짝도 못 하던 순둥이들이었다.
우리는 튤립이 흐드러질 때면 에버랜드에 꽃놀이를 가고, 크리스마스이브엔 롯데월드에서 야간 놀이도 하고
겨울엔 눈썰매장, 여름엔 바닷가로 향하며
그렇게 함께 계절마다 시간의 추억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들도 자라고,
이제는 사진을 찍을 때마다 ‘번개 파워!’ 하고 주먹을 내미는 나이가 되었다.
사진마다 빠짐없이 내뻗은 조카들의 그 주먹에
마치 내가 진짜 한 대 맞기라도 한 듯, 얼얼하게 웃게 되었을 즈음.
정말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일이 벌어졌다.
그렇게 한 형제처럼 늘 붙어 다니던 조카들이
어느 날, 호주로 이민을 가게 됐다.
아이들을 더 자유롭게 공부시키고 싶다는,
동생 부부의 오롯한 선택이었다.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지만, 끝내는 마음 깊이 응원해 주었다.
나는 떠나는 큰 조카의 손을 꼭 잡고,
슬픔 대신 힘을 실어 물었다.
“완서야, 호주 가서도 잘할 수 있지?”
조카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이모, 나 영어도 잘해! 말이 영어로 ‘호올스’야.”
달랑 ‘홀스’ 한 단어만 믿고 호주로 떠난 큰 조카는 겨우 일곱 살, 작은 조카는 다섯 살이었다.
한창 귀엽고, 눈에 밟히던 나이에
내 일상 속에서 툭 하고 빠져나가 버렸다
.
.
.
동생네가 호주로 떠난 후의 일이었다.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게 발을 걸어 넘어뜨리려는 뭔가가,
자꾸만 따라붙어 모든 게 꼬이는 날.
그날따라 남편과는 기억도 안 나는 일로 말다툼을 했고, 큰딸도 뭔가에 삐져서 휙 학교로 가 버렸다.
작은딸은 심기 불편한 엄마 눈치를 살피다,
조용히 집을 나섰다.
하필, 내 생일날이었다.
남편과 딸들, 누구한테서도 축하 인사 한마디 듣지 못했다.
그날의 기분도, 집안 공기도 엉망이었고,
모두가 나간 뒤, 풀리지 않는 기분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내 주변 공기까지 시커멓게 흑화 시키고 있었다.
지금껏 살아오며 가장 우울하게 마음에 남은 생일이었다.
그러다 나는 곧장 백화점으로 향했다.
매장을 한참 서성이다가, 주부인 내가 입을 일도 없는
비싼 정장 한 벌을 홧김에 질러버렸다.
화가 난 김에 분풀이로 돈을 써버렸지만,
결국 저녁에 가계부를 쓰면서 후회할 게 뻔한 지출이었고, 마음은 조금도 위로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니, 텅 빈 거실만이 나를 맞았다.
비싼 옷 봉투를 손에 들고 있었지만,
허전한 마음은 도무지 채워지지 않았다.
분명 내 생일인데,
세상 어디에도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그때, 무심코 본 전화 자동응답기의 빨간 불빛.
전화가 와 있었나 싶어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곧,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모! 이모! 생일 축하해~~ 히히.
야, 밀지 마! 해피 버스 데이 투 유~ 투 유~
사랑하는 이모야… 이모의… 해피 버스 데이 투 유… 하하, 흐흐…”
두 조카 녀석이 서로 밀치고 앞서겠다고 깔깔대며,
국제전화로 수화기 앞에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준 모양이었다.
물론, 멀리서도 언니의 생일을 잊지 않고 챙겨준 동생의 마음 덕분이겠지만.
사랑스러운 조카들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지고,
그리운 목소리에 나는 결국 무너져 버렸다.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흐느끼고 말았다.
얼마나 그리웠던 ‘이모’라는 소리였는지,
얼마나 보고 싶던 저 웃는 얼굴이던지.
특히나 오늘처럼 마음이 서글플 땐,
당장이라도 달려가 꼭 안아보고픈 나의 조카들.
지금은 덩치가 산만한 너희들에게,
내가 끝까지 충성하리라 마음먹었던 그날의 기억.
내 마음만큼은 여전히 그날에 머물러 있다.
그 마음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런데 말이다, 사랑하는 조카들아!
늘 이모가 마음속으로 빌었던
“튼튼하게만 자라다오”는… 좀 심하게 이뤄진 것 같구나.
이제 슬슬, 다이어트 좀 해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