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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 여성 호르몬

은퇴 부부의 동거일기

by 연글연글




남편은 늘 씻고 나오면 피부가 끈적거린다며, 기초 화장품은커녕 나갈 때조차 선크림도 바르지 않았다.

거무튀튀한 피부로 묵묵히 중년을 지내더니,
얼마 전부터 갑자기 레티놀에 푹 빠져버렸다.
팔자 주름이 깊어졌단다.
그래서 레티놀이 필요하단다.

유튜브 팔랑귀답게, 또 어디선가 주워들은 모양이다.

​나는 시큰둥하게 넘겼지만, 어느 날 아침 내 코앞으로 핸드폰을 들이민다.
얼마나 간절했는지, 너무 가까이 들이대서 눈이 침침해진 나는 손으로 밀어 거리를 조금 떼어낸다.

​화면을 들여다보니, 거기에는 ‘레티놀 세럼’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다.

가격은 만 오천 원대라 비교적 저렴한데,
효과는 십오만 원짜리인 양 선전을 늘어놓는다.

말이 되나?
요즘 시술로도 안 펴진다는 굵은 팔자 주름이
고작 세럼 한두 통으로 펴진다니.

​무시하고 싶었지만,
비싸지도 않은 걸 안 사준다고 또 싸우기 싫어서
떡 하나 던져주는 마음으로 바로 온라인 주문을 눌렀다.

​배송이 오자마자, 스포이드처럼 생긴 뚜껑으로 작은 세럼을 한두 방울 짜서
팔자주름에 열심히 문질러대는 남편.

​‘꽤나 젊어지고 싶은가 보다’ 싶었다.

​거울도 잘 안 보는 나보다 더 부지런히 미용에 신경 쓰는 그 모습이
왠지 신기하고, 조금은 귀여운 구경거리였다.

​그런데 문제는, 효과가 있냐 없냐가 아니었다.
이 세럼의 색깔이 빨갛다는 거다!
대체 왜 얼굴에 바르는 걸 빨갛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저녁마다 씻고 나온 남편이 팔자주름에 붉은 세럼을 바르고 나타나면,
꼭 불타오르는 고구마 같았다.

​그리고 아침.
하얀 베개며 이불에 불긋불긋한 얼룩이 번져 있었다.
온 집안 침구를 하얀색만 고집하는 나로선,
속이 부글부글 끓을 수밖에 없었다.

​세탁기를 돌리고 꺼내보니,
아우, 안 지워진다!
아, 속 터진다!

​검증도 안 된 화장품을 싸다는 이유로 사달라고 조르는 남편을 볼 때마다,
아들이었으면 등짝이라도 한 대 때려서 정신 차리게 했을 텐데... 싶다.

​결국 효과는 하나도 못 보고,
침구만 얼룩투성이로 만들어버린 그 화장품 때문에
나한테 욕을 한 바가지 얻어먹고는,
이제야 포기했나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손녀 돌보기를 마치고 집에 가려고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 중이었다.

그때 큰딸이 화장품 하나를 내밀었다.
미국에서 사 온 레티놀이라며.

​마침 현관문을 열고 있던 남편은
그 말을 듣자마자 되돌아 들어오더니,
“레티놀이라고?” 하고 반색하더니 바로 낚아채 갔다.
동작이 어찌나 빠르던지, 딸과 나는 그만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도 레티놀에 대한 열광이 사그라들지 않은 모양이다.

나이가 들면 남성에게도 여성 호르몬이 찾아온다기에,
버럭대는 성질머리가 좀 누그러지길 바라며
나는 그날이 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려 왔다.

​설마… 이게 바로 그 전조 증상일까?

​암튼, 레티놀 많이 바르시고,
새끼손가락 세워 찻잔을 호로록 들어도 이해할 거고,
티브이 보다가 훌쩍이는 날이 와도 다 이해할 테니,

그러니 이제 좀 덜 버럭 대고,
말도 살살 건네주고,
내 농담에도 조금만 더 크게 웃어주고,
가끔은 먼저 “수고했어” 하고 토닥여주기를.

​젊은 시절 착했던 남편은 세월의 고단함에 버럭이가 되었지만,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말랑말랑한 할아버지이기를 소망한다.

​어서 오라, 여성 호르몬이여! 남편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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