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는 철학 공부
면접 때문에 고민하다가 월세를 내기 위해 4일 동안 열심히 포장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정장 재킷을 샀다. 옷 가게 사장님이 검은색 기본형이기 때문에 깨끗하게 잘 입으면 몇 년이고 두고두고 입을 수 있어서 좋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나의 면접이 잘 되기를 기원해 주셨다. 참 요즘 눈물이 많아졌는데 이런 말만 들어도 뭉클하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기고 나왔다. 그리고 가족, 친구, 지인들의 바람이 통했는지 면접에 합격했다.
금요일 오후 2시 30분에 면접을 봤는데 그동안 낮 밤이 바뀐 생활을 하기도 했고 긴장이 되어 아침 6시가 다 되도록 잠을 못 잤다. 면접 시간이 오전이 아닌 오후라 다행이었다. 화요일에 서류 합격통보를 받고 수요일, 목요일 이틀 동안 같은 분야 면접 합격, 불합격 수기를 찾아보며 예상 질문 답변에 관련된 공부를 계속했다. 면접 당일, 긴장을 풀 겸 면접 장소까지 30분 정도 걸어서 갔는데 막상 도착하니까 너무 떨렸다. 맥박수가 빨라졌고 심장이 두근두근거려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건물로 들어가기 전 동생과 잠깐 통화를 하고 면접장소로 들어가 대기했다. 한 명씩 면접을 보는데 내가 먼저였다. 다른 면접 대기자 분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나보다 스펙이 좋았다.
면접은 20분 정도 진행됐다. 이론을 엄청 공부해서 갔는데 웬 걸. 그런 건 전혀 물어보지 않으셨고 자소서를 중심으로 정말 꼼꼼하게 질문하셨다. 아마도 면접자가 쓴 것이 진짜인지 검증을 제대로 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면접관님들이 보시기에 좀 독특한 경력과 활동이라 궁금한 게 많으셨던 것 같다. 서울 왕십리에서의 글쓰기, 독서, 영화 모임에 대해서도 자세히 질문하셨고 나의 가치관, 신념을 이루고자 내가 행동했던 현실적인 경험에 대해서도 물었다. 심지어는 오은영 박사의 금쪽같은 내 새끼를 매주 보고 있다고 썼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얘기해 달라고도 하셨다. 당황했지만 오랜 모임 경력을 바탕으로 대답은 차분히 잘 해나 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면접이 끝나고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떨려서 준비한 말을 다 하지 못했다. 하지만 왠지 나를 알고 싶어서 질문을 계속하게 된다는 말씀이 부정적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면접 결과는 월요일 오전, 늦어도 오후에 전화로 알려주신다고 했는데 저녁 5시가 좀 넘었을 무렵 전화가 왔다. 합격했다고. 좀 일찍 결과가 나왔다고 했다. 정말 감사했다. 이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 친구들에게 알렸다. 나는 들뜨지 않으려고 했다. 결과에 정말 감사하지만 내가 이 일에 잘 적응할지 어떨지 알 수 없고 출근일도 3월 2일이기 때문에 경거망동하지 않으려고 한다.
엄마, 아빠는 *노마드 삶을 사는 딸이 엄청 걱정이 됐었나 보다. 돈도 여태 모으지 않고 일하다 금방 그만두고 놀다가 또 돈 떨어지면 일하다 그만두고 놀기를 반복하니… 나는 이 삶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엄마는 이제야 걱정을 놓겠다며 한숨을 쉬며 웃으셨다. 영상통화로 엄마랑 이야기하고 끊으며 내가 참 걱정을 많이 끼쳤구나 싶어서 죄송하기도 하고 걱정을 덜어드렸다는 생각에 홀가분해졌다.
[*노마드(nomade, 유목민)- 땅에 뿌리내리고 토박이로 살며 정체성과 배타성을 지닌 민족을 이루기보다는, 어떤 정해진 형상이나 법칙에 구애받지 않고 바람이나 구름처럼 이동하며 삶을 정주민적인 고정관념과 위계질서로부터 해방시키는 유목인의 사유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노마드 - 철학에서의 유목민적 사유 (생활 속의 철학, 서동욱)]
지금 구한 일도 9시부터 6시까지 하는 일은 아니고 주 12시간만 하면 되는 일이라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거나 다른 일을 병행할 수도 있다. 직업적으로 더욱 전문성을 갖추기 위한 자격증 공부와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 독서, 영화감상, 전시회 방문 등을 할 생각이다. 니체는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쓰지 않는 사람은 노예다.”라고 말했다. 니체의 말로(末路)는 좋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사상은 너무나 매혹적이다. (기본소득, 노동시간 단축, 주 4일제를 지지합니다!!)
면접을 준비하며 철학 공부를 깊게 할 수 있어서 좋았고 공부하면서 너무 재밌었다. 철학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 "5분 뚝딱 철학" 유튜버 선생님께 감사하다. 심리학자와 철학자는 이론과 사상이 깊이 연관되어 있다. 긍정심리학의 마틴 셀리그만, <죽음의 수용소에서> 저자로 유명한 로고테라피의 빅터 프랭클, 논리철학논고를 쓴 비트겐슈타인… 이들의 이론과 사상에 큰 영감을 받았다. 아무튼 이전 시대에도, 지금 시대에도 사유하는 사람들의 존재는 매력적이고 왠지 유대감을 느낀다. 이 사람들하고 언어가 통한다면 같이 신나게 토론도 하고 이야기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면접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많이 불안하고 우울했다. 그것은 면접에 떨어질까에 대한 불안이나 우울이 아니었다. 면접을 준비하기 위해 몰입했던 순간들이 나에겐 기쁨이었다. 그게 사라지는 것에 대한 불안과 우울이었다. 다시 무언가가 필요했다. 아, 다음 주 수요일 독서모임 때까지 읽어갈 책이 있지. 그리고 면접은 끝났지만 철학 공부에 흥미가 생겼으니 계속해야지… 그런데 내가 면접을 준비할 때처럼 이렇게 열심히 공부를 할까?
면접 끝나고 집에 오자마자 누워 버렸다. 정말 피곤했다. 밥해먹을 힘도 없었다. 면접복을 사고 남은 통장 잔액은 2만 원. 그때 오빠가 합격 축하한다고 용돈을 보내줘서 감사한 마음으로 초밥을 시켜 먹고 피곤해서 잠이 들었다. 며칠 동안 면접 준비하느라 청소도 못해서 방은 엉망이었다.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방 청소하고, 책 읽고, 공부도 다시 시작하자고 마음먹으며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