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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May 23. 2024

초여름 셀러리 김밥의 명랑한 초록맛

   성인이 되어 누리는 맛 중 하나는 쓴 맛이다. 달고, 짜고, 매운 음식을 향하던 손이 언젠가 쓴 맛과 인사하고 더할 나위 없는 절친이 된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아메리카노 몇 잔은 이젠 내 몸의 연료 역할을 해낸다. 저녁이면 어떤 날은 황금빛 라거를, 선선한 바람이 부는 날엔 향긋한 밀맥주를 마신다. 주말에 곱창과 삼겹살에 과 페어링한 투명하고 맑은 소주는 잘 배운 행동이 된다.



  아차, 싶은 순간은 2년마다 돌아온다. 연말에 숙제하듯 하는 건강검진 앞에 나의 초조함은 감출 길이 없다. 20대 후반부터 LDL콜레스테롤 수치의 압박을 느껴온 나는 건강검진을 앞두고 벼락치기 금주를 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의 364일은 잊어주길. 제발 이틀의 내 몸만 기억해 주길. 그러면서 부은 눈을 뜨고 건강검진 전 마지막 커피를 마신다.




  아차차. 아침마다 빈 속에 마시는 아메리카노 한 잔은 어쩐담. 요 며칠 아침 양치질을 할 때 헛구역질이 몇 번 나오곤 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위염? 역류성 식도염? 아직 진단받진 않았지만 만약 내일 건강검진 위 내시경에서 위염을 진단받으면 어쩌지? 눈앞에 펼쳐지지 않은 불안이 밀려온다. 커피도 끊으면 너무 가혹한 삶이다. 봐주는 게 없는 몸이 야속하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과연 내가 커피를 끊을까? 생라면을 끊고, 술을 끊을까? 결론은 아니올시다. LDL콜레스테롤 수치를 신경써야 함에도 곱창에 삼겹살 먹고 소주와 맥주를 마시는 나는 한 번에 커피를 끊는, 마음 먹으면 그대로 해내는 심지 굳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삼겹살 먹을 때 마늘이랑 양파 잔뜩 쌈 싸서 먹으면 되고, 커피 마시기 전에 올리브오일 한 스푼 먹으면 되지! 하고 합리화하는 게 나란 사람이다. 이 나이가 준건 융통성 아니던가.




  그렇게 마트에서 내 팔을 채소 쪽으로 더 가까이 뻗어본다. 오늘 닿은 손 끝엔 초여름을 닮은 연둣빛과 라임빛의 사이쯤으로 보이는 셀러리 한 통이다. 이유는 하나. 색이 예쁘니 셀러리 너도 장바구니에 넣어 가자.




  

  셀러리와 포도, 달걀을 잘라 소금 톡톡 뿌리고

올리브 오일 한 바퀴 두른 후, 여름의 상큼한 화이트 발사믹도 한 바퀴 뿌려주었다.

연두! 노랑! 하양! 노랑! 빨강! 알록달록한 색깔만으로 초여름의 습도를 날려준다.



  그렇게 셀러리 첫 입. 어쩜 셀러리는 이렇게 투명한가. 연두와 라임 사이의 빛에 누가 봐도 수분을 탱탱하게 머금은 셀러리 한 입을 와삭 베어문 순간, 입 안에 연두색 쌉싸름함이 향수처럼 배어들어온다. 꽉 들어찬 연둣빛 수분감이라니! 턱의 양 쪽에서 침샘이 앞 다투어 폭죽을 터트린다. 이 장난 같은 명랑한 녹색의 맛에 웃음이 난다.




 

  그렇게 나는 초여름에 셀러리와 안면을 텄다. 계절 인사처럼 초여름만 되면 셀러리가 반가워 냉장고에 쟁인다. 녹색의 포도와 함께, 때론 부라타 치즈와 함께 셀러리를 놓는다. 물론, 셀러리 핑계 삼아 황금빛 밀맥주도 놓이고, 계절와인인 쇼비뇽블랑도 놓인다. 아! 연둣빛 셀러리는 그러고 보니 황금빛 알코올과 궁합이 맞는구나! 역시 글을 쓰다 또 배운다.



  우리나라에서 채소 축에 끼려면 반드시 정복해야 할 곳은 어쩌면 김밥 속이 아닐까. 셀러리 너 비록 바다건너에서 왔지만, 한국에선 김밥 안에 들어가 봐야 채소란다. 그렇게 나는 셀러리 김밥에 도전한다. 자타공인 김밥순이인 나는 사실 김밥을 만들면 안 된다. 김밥은 공기와 같아서 나는 김밥을 끝없이 먹을 수 있다. 손이 도통 멈추질 않는다. 김밥을 먹을 때 느끼는 나른함과 뇌도 살찌는 기분을 김밥순이인 나는 사랑한다.



  삼겹살과 소주엔 양파와 마늘쌈을, 공복 커피 전엔 올리브 오일 한 스푼으로 합리화 한 나는 내 사랑 김밥에도 합리화 한 스푼 넣어본다. 셀러리 김밥. 셀러리야, 내 LDL콜레스테롤을 막아줘! 먹기 위한 합리화엔 끝이 없다.


셀러리, 파프리카, 달걀, 단무지, 맛살 큼직하게 넣어 돌돌 셀러리 김밥을 말아본다. 김밥 안의 빛나는 달걀과 단무지의 노랑, 파프리카와 맛살의 빨강, 셀러리의 연두와 라임을 아무 죄가 없는 흰 쌀이 다정하게 감싸준다. 그래, 흰쌀밥이 언제부터 그렇게 눈칫밥을 먹게 되었나. 이렇게 고소한데! 눈이 소복이 내린 듯 이렇게 아름다운데!



  알록달록한 색 한번, 향긋하고 비릿하고 짭조름한 향 한번, 참기름 반질반질 바른 윤기 나는 검은 김을 만지며 셀러리 김밥을 감각한다. 아름다운 순간이다. 그렇게 또 와삭. 노랑, 빨강, 연두의 아삭함과 하양의 이불 같은 보드라움을 씹는다. 입 안에 상쾌함의 폭죽이 터진다.



  내 의도는 불순했다. LDL 수치에도 불구하고 곱창과 삼겹살을 위해, 맥주와 소주, 커피, 그리고 와인을 먹기 위해 셀러리를 샀고 채소를 일부러 먹은 것은 사실이다. 다만, 내 합리화 덕분에 셀러리 김밥의 세계를 감각하고 있다.



  나이를 먹어서 걱정되는 부분이 매해 두더지 게임처럼 솟아오른다. 그래도 나이를 먹어서 좋은 점 하나는 내가 경험하는 맛의 세계도 울창해지는 데 있다. 초여름, 셀러리 김밥의 명랑한 녹색의 맛도 나는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또 퉁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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