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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잘한다는 것
공부는 과거의 생각을 배우는 일입니다. 우리는 수 세기 이전부터 밝혀진 이론을 배웁니다. 21세기인 현재를 살아가고 어쩌면 22세기를 살아갈 우리가 과거의 생각을 배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과거의 생각이 여전히 유용하기 때문일 겁니다. 현재 공부하는 과거의 생각들은 수십세기동안 살아남은 것들입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인류의 삶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하지 않고 살아남아 현재의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는 것은 인류를 돕는 의미 있는 생각이라는 확실한 증거니까요. 지식을 축적하며 인류가 발전했듯 우리는 과거의 생각을 내 머릿속으로 가져오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 읽고, 쓰고, 외웁니다. 이때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우리는 과거의 생각을 정확하게 입력해서 오타없이 출력하면 잘 공부한 것일까요?
과연 ‘잘한다’는 어떤 의미일까요?
요리를 잘 한다는 것은 생각해 보겠습니다. 요리를 잘하는 식당은 그 식당만의 맛과 멋이 있습니다. 요리사는 한 그릇의 짜장면을 만들기 위해 오랜 시간 공들여 연습해서 숙달된 칼질로 양파와 고기를 썰어냅니다. 이건 기본기입니다. 반복적인 연습과 노력으로 정확도와 분명함을 가진 기본기는 필수입니다. 탄탄한 기본기 위에 창의력이 다리를 쭉 뻗고 춤추고 놀 수 있습니다. 나만의 멋과 맛은 기본기 위에서 나옵니다.
쫄깃한 면과 춘장 맛으로 승부하고 싶은 요리사는 양파와 고기를 최대한 작게 썰어 면과 춘장 본연의 맛에 집중할 수 있는 한 그릇을 만들 것입니다. 양파와 고기를 면과 함께 즐기며 입체적인 식감으로 승부하고 싶은 요리사는 너무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아서 양파와 고기를 면과 함께 서너 번 정도에 씹을 수 있을 만큼의 크기로 썰어 한 그릇을 만들 것입니다. 짜장면 한 그릇을 위해 요리사가 쌓아온 수년간 갈고 닦은 칼질, 음식 재료를 보는 눈, 재료의 익힘과 균형, 담음새가 튼튼할수록 요리사가 의도한 짜장면의 완성도가 높아집니다. 그때 춘장 맛을 살린 맛집, 식재료의 아삭함이 살아있는 맛집, 면이 쫄깃한 맛집이 됩니다. 맛집은 그렇게 고유한 맛을 갖게 됩니다.
노래를 잘한다는 것, 춤을 잘 춘다는 것, 글을 잘 쓴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탄탄한 발성과 기술을 기본기 삼아 기존 노래를 능숙해지면 기존의 노래를 따라가던 내가 노래를 위에서 내려다보게 됩니다. 기존 보컬의 감정도 보이지만 나는 다른 부분에 더 마음이 끌려 그 부분에 감정을 더 담아 노래합니다. 그렇게 내 목소리로 내 감정을 부를 때 노래는 나와 누군가에게 영감이 되어줍니다. 춤도 그렇죠. 스텝과 웨이브의 기본기를 연습하는 지난한 기본기의 과정을 지나 내 몸에 익힙니다. 노래와 비트에 귀를 기울이면 내 몸에 새겨진 나만의 스텝이 노래와 비트 위에 자유롭게 흘러넘칩니다. 글을 잘 쓴다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능숙한 기본기 위에 노니는 자신만의 생각, 움직임, 말과 글, 행동은 누군가에게 영감을 줍니다.
그렇다면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언가를 잘해서 자신에게 성취감과 삶의 의미를 키우고, 타인에게 감동과 영감을 준다는 것의 공통점은 튼튼한 기본기를 길러 기존의 창조물에 나만의 목소리, 움직임, 맛을 입혀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는 나만의 변형을 만들어내는 나의 실현인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 왜 공부만은 유독 잘 외우고 외운 대로 잘 쓰면 잘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어쩌면 우리는 공부의 반쪽만을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공부를 잘한다는 것에 관한 생각을 달리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잘 한다는 것이 해당 분야의 탄탄한 기본기를 쌓는 과정을 거쳐 그 위에 나만의 스타일로 나를 실현하는 것이라면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도 양면입니다. 한쪽 면은 과거의 생각을 정확하게 배우고 익혀 기본기를 쌓는 일이고, 다른 한쪽 면은 공부한 과거의 생각을 내 필터로 걸러 나만의 생각을 지어보는 일입니다. 과거의 생각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인출하는 것을 공부 잘한다고 여기는 것은 마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을 재생한 블루투스 스피커가 스스로 잘 연주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공부는 블루투스 스피커가 되고 싶어 하는 일이 아닙니다. 과거의 생각을 통해 생각의 기본기를 익혀 나만의 생각을 지어내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일입니다.
나의 목소리는 우주에서 유일합니다. 나의 글씨체도 나만의 흔적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살온 방식으로 연결한 뇌의 시냅스 곳곳마다 나만의 지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과거의 생각을 내 필터로 걸러 내 목소리, 내 글씨체에 실어낼 때 우주에서 유일무이한 내 목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내가 읽은 책, 기억, 반복해서 공부했던 기억, 긴장과 불안, 성취의 경험이 엮여 내 뇌의 모습을 지어갑니다.
“Perfect practice makes perfect.”
연습만으로는 할 수는 있으나 잘할 수 없습니다. 익숙함과 능숙함은 다릅니다. 익숙하지만 올바르지 않은 자세로 운동하면 도리어 몸을 다치게 됩니다. 정확한 연습이 능숙함과 실력을 만듭니다. 오랫동안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정확한 방법으로 연습합니다.
저는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기본기가 튼튼한 학습자가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저도 평생 배우는 사람으로서 기본기가 튼튼한 학습자가 되어 도무지 잘 공부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잘 배워서 나만의 건강하고 지혜로운 목소리와 몸짓, 생각들을 다양하고 아름답게 피워내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아름다운 생각이 울려 퍼지는 울창한 그곳에서 우리 함께 서로의 지문이 담긴 생각들을 주고받기를 소원합니다.
맑고 단단한 가을, 저부터 잘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