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학과 재학시절 정신간호학 실습 때, 노인들의 치매예방을 위해 ‘일기쓰기’만큼 효과인 것이 없다고 배웠다. 이 좋은 것을 배웠으니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바로 적용시키기로 했다. 묵혀둔 빈 노트 한 권, 펜 하나씩을 쥐어주며 아침에 일어나 무엇을 먹고, 노인정에 가서 누구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했나, 저녁에 본 드라마는 무슨 내용이었나. 간단히 적어도 되니 거르지 말고 꼭 쓰도록 했다.
할아버지를 위해 시작한 프로젝트였다. 가끔가다 잘 쓰고 있나 물어보는 정도였다. 걱정이 무색하게 두 노인은 사랑스럽게 마주앉아 상을 펴고 일기를 쓰곤 했다. 원래 싸움구경 다음으로 재미있는 건 일기장 훔쳐보는 것 아닌가. 프라이버시라는 것이 중요하지만 숙제를 낸 손녀로서 숙제검사라는 명목으로 ‘몰래’ 일기장을 훔쳐봤다.
할아버지의 일기를 몰래 이야기해보자면, 하루에 두 줄, 세 줄 생활계획표 같은 그의 일기장은 정말 귀여웠다. 예상대로였다. 아침식사 반찬은 무엇이었는지, 커피는 언제 먹었는지, 전동차를 타고 어디에 다녀왔는지, 그의 놀이터인 다이소에서 무엇을 사왔는지가 적혀있었다.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 맞춤법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손녀라서 알아보는 글씨들을 보며 흐뭇한 웃음이 지어졌다.
이제 할머니 차례다. 첫 장을 열자마자 다른 노트를 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놀라 표지에 써진 “일기장” 이라는 글씨를 확인하고선 다시 열었다. 할머니의 일기장은 한 페이지의 종이가 모자랄 정도의 긴 글이었다. 정성스러운 글자들을 하루, 이틀, 삼일 치를 천천히 읽다가 더 읽을 자신이 없어 덮어버렸다. 할머니는 6남매의 장남인 할아버지에게 시집을 와 어마어마한 종가집을 책임지던 맏며느리 역할을 하면서도 그 시절 쉽지 않았던 여성의 경제활동, 사회생활도 해나가던 원더우먼 그 자체다. 뿐만 아니라 봉사활동도 꾸준히 해 어릴 적 할머니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소년, 소녀 가장들이 자라서 보낸 편지들도 있을 정도로 멋진 사람이다.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유치원 재롱잔치, 학교 공개수업, 운동회 등 엄마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거기다가 나이는 80이 넘었지만 카카오톡 이모티콘도 사용할 줄 알고 좋은 곳에 가면 셀카도 찍을 줄 안다. 나에겐 신적인 존재 그 자체이며 그녀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이도 사랑한다.
그런 그녀의 일기장 속에는 단 하나의 기쁨도 없었다. 기쁨이 없는 것에만 그쳤다면 오히려 다행이었을 것을, “우울하다”는 단어가 하루에도 몇 번씩 나타났다. 일상의 모습을 담은 할아버지의 일기장과는 달리 할머니의 종이 안에는 일상의 감정들이 생생히 담겨있었다. ‘파킨슨병’이라는 악마와 싸우며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던 그녀는 그토록 사랑하던 자기 자신이 시간이 갈수록 약해지는 모습에 한 없이 슬퍼하고 있었다. 동네 친구들과 지자체에서 마을지킴이라는 이름으로 새벽에 거리 청소를 하며 심심한 용돈 벌이를 하던 그녀는 몸이 힘들어지면서 조금 쉬어야할 것 같다며 그 자리를 마다했다. 그 이야기도 일기장에 고스란히 적혀있었다. 나이가 들어 병이 생겨 용돈 벌이도 못하게 된 신세라며 종이는 한탄으로 가득 찼다. 부녀회장의 자리를 내려놓고, 노인정의 총무 자리를 주저하고 집에서만 지내는 날들이 많아지면서 부터였을까, 아니면 집에서 지내는 날 동안 그 자리들을 다 내려놔야겠다고 생각했을까? 그 순서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의 속은 항상 어두운 색이었다. 그녀의 모든 생각과 진심이 담겨있는 일기장을 들키면 더는 안쓸것같아 아무도 손대지 않은 것처럼 다시 예쁘게 덮어놓았다.
슬픈 영화를 보아도 눈물 흘리지 않는 그녀의 눈물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 엄마와 큰 소리로 다투고 어김없이 할머니 옆에 앉아 내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했더니 할머니는 오히려 나를 혼내며 말했다. “나는 우리 엄마 돌아가실 때까지 털 신 하나를 못 사 드렸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니고 지나고 나면 이런 것만 생각나. 그러니깐 생각 잘해.” 라며 얼른 휴지를 찾아 눈물을 닦았다. 나의 무뚝뚝함은 할머니를 닮았다. 무던한 할머니의 눈물을 보니 아찔해졌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슬픔을 안고 사는 구나. 그게 끝이었다. 어떤 위로도 되지 않을 것 같아 “알겠어.” 라고 말했다.
왠지 노트가 더 필요할 것 같아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일기들은 잘 쓰고 계신가? 노트 더 필요하지 않아?” 하며 물어봤다.
할아버지는 “됐어. 안 써도 다 기억해!” 라며 영어책 베껴 쓰기만 계속 할 뿐이었다. 억지로 쓰는 일기는 일기가 아니라는 생각에 알겠다며 시선을 할머니에게로 돌렸다.
“할머니 노트 더 필요하지? 열심히 쓰던 것 같던데.”
할머니는 “다 찢어버렸어.” 라고 말했다. 토르의 망치로 머리를 세게 맞은 것 같았다.
“다 찢어버렸다고? 왜? 버려도 그냥 버리면 되지. 왜 다 찢어서버렸대? 나 안 봐. 거짓말 안쳐도돼~” 하며 놀란 가슴을 붙잡고 이야기했다.
“글씨가 잘 안 써져서 성질이 나잖아. 손에 힘이 안 들어가.” 그렇다. 병세의 악화로 젓가락질도 불안해 보인다. 한 템포 쉬고나서야 대답할 수 있었다.
“아, 그럼 쓰지마~ 내가 깜빡하고 너무 어려운 숙제를 냈다. 그치?” 쓰지 말고 머릿속으로 쓰는 거야 알겠지? “ 매일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을테니 그녀에게는 공짜 숙제나 다름 없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슬픔은 무섭다. 특히나 그 슬픔이 내 옆 사람의 것이라면 더 무섭다. 지나고 나면 생각날 것들을 만들기 위해 요즘은 열심히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스킨십을 한다. 아침에 눈뜨면 그들의 이부자리로 달려가 볼 뽀뽀도 하고 늦잠을 잔 날 빨래를 널고 있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안아줘” 라며 애교도 부린다. 가족끼리 위안을 주는 중요한 제스처 중 하나는 포옹이다. 사무적인 관계나 처음 만나는 사이에서도 포옹을 할 수 있지만 가족처럼 가까운 존재와 하는 포옹은 기분을 편안하고 안락하게 만든다.
포옹이 신체 건강에 미치는 좋은 영향도 있다. 포옹과 같은 스킨십을 하면 피부 감각 중 ‘파치니 소체’라고 불리는 압력 수용체가 활성화된다. 이 수용체는 혈압을 떨어뜨리는 기능을 하는 뇌 부위인 미주신경에 신호를 전달해 혈압 상승을 예방한다. 심리과학저널에 실린 연구에 의하면 포옹과 같은 스킨십은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감소시키는 역할도 한다. 곰 인형과 같은 물체를 껴안는 것만으로도 공포심이 누그러들며 특히 가까운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물체를 껴안았을 때는 공포감 완화 효과가 더욱 강력하게 작용한다. 포옹은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의 수치를 떨어뜨린다. 긴장감이 풀리면서 차분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노인에게 포옹은 정신적 고통을 덜어주는 효과가 있다. 노인이 되면 체력이 약해지는 것은 물론, 정신적으로 외롭다는 느낌도 많이 받게 된다. 이때 포옹을 하면 상대와의 친밀감이 느껴져 외롭고 고독한 느낌이 상쇄된다고 한다.
그러니, 소중한 사람일수록 자주 안아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