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아름다운 도시들이 많지만 서울처럼 역동적이고 다채로우며 역사와 문화를 품은 도시도 드문 것 같다. 서울은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해설사의 도움을 받으며 자세히 둘러본 창덕궁은 아는 만큼 보였다. 그 압도적인 규모, 내부에 나 있는 큰길과 건물마다 스며 있는 역사가 상념에 빠지게 했다.
구중궁궐이란 말대로 예전에 일반 백성은 범접할 수도 없었던 곳이다. 나라님이 기거하고 정사를 돌보는 현장을 이젠 누구나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다니 새삼 감격스러웠다. 우연히 들른 고궁 음악회는 외국 관광객들도 많았는데 ‘K컬처가 하루아침에 세워진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게 할 만한 멋진 공연이었다.
같은 날 늦은 오후, 미루고 미뤘던 청와대 관람도 했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이 수없이 지나치고 다녔을 그 길. 그의 눈길이 닿았을 나무와 건물을 눈과 휴대폰에 담고 가파른 산책로도 한 바퀴 돌아봤다. 한때 국가권력의 핵심이었던 장소를 자유롭게 산책할 수 있다니 꿈만 같았다.
청와대에 다녀온 직후 오래전 뉴스를 스크랩한 책을 열어 보니 박대통령이 처음 취임했을 때만 해도 쇠고기 1킬로그램을 구입하는데 필요한 주요국의 노동 시간이 나와 있었다. 일본이 5시간 59분, 이탈리아 6시간 14분, 서독 2시간 49분, 영국 1시간 47분, 미국 54분이었다. 한국은 당시엔 ‘측정 불가’로 나오지도 않는다. 일본 관광객들 사이에선 이구동성으로 ‘일본이 싸다’라는 말이 무성한데다 요즘 분위기 때문인지 매체마다 단신으로 취급했지만, 올드머니로 으레 각인돼 온 일본을 1인당 GDP에서 추월하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지금의 한국은 ‘쇠고기국에 쌀밥 말아먹는 걸’ 아직 한번도 실현하지 못한 나라를 옆에 두고 있지만, 연간 쇠고기 소비량이 쌀보다 많은 나라가 됐다. 일본이 2위 자리를 굳건히 지킬 때도 어쩌다 일본 이야기가 나오면 해외 고객들에게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우리가 한 수 위라는 것을 주지시켰던 필자의 생각이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아직 팩스를 사용하고 있고 증명서 하나 발급을 위해 원적지에 가야 하는 비율이 90%에 이른다는 디지털 후진국이지만, 기초 과학 분야, 소재 산업 등에서 기본기가 탄탄한 일본의 저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요즘 반도체 경기 활황에 힘입어 수출과 경제성장이 예상치를 뛰어넘고 있다. 다른 산업이 훌륭한 수비수라면 반도체는 최고의 스트라이커임에 틀림없다. 이 회복세가 얼마나 지속될 진 알 수 없으나 국운이 다시 상승 국면에 접어든 건 맞는 것 같다.
해가 뜬 날이 지붕을 고칠 때라는 말대로 지금이 반도체 투자의 적기인 듯하다. 클러스터를 건설하고 운영하려면 막대한 전력공급이 용수 이상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각종 민원과 지역 이해관계는 물론 전력과 관련한 RE100 등 고객사들의 친환경 요구사항까지 수용해야 하니 정말 사업하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글로벌 고객사들은 요구만 하는 게 아니라 전방위적인 현장 실사를 통해 기준에 맞지 않으면 벤더 리스트에서 가차 없이 삭제한다는 걸 감사 대응 책임자로 일해봐서 잘 알고 있다. 요구사항 목록을 훑어보니 준수하기가 만만치 않아 보인다.
저녁이 있는 삶이 중요하지만, 남들 잘 때 다 자고 놀 때 다 놀아서는 남다른 성공을 이룰 수 없다. 무리해서는 안 되겠지만, 우리가 1등이 되기까지는 필요할 때 가끔 개인사를 뒤로 미루고 회사 일을 우선시하던 예전의 정신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