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D, Yale 거쳐서 홍대에서 디자인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디자인은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다.”
그중에서도 타이포그래피는 말투를 설계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같은 단어라도, 어떤 서체로 말하느냐에 따라 전하는 어조, 감정, 뉘앙스가 완전히 달라진다. 이 믿음을 바탕으로, 나는 매 학기 실험적 타이포그래피 수업을 운영하고 있다. 이 글은 그중 4주간의 수업을 기록한 것이다. 학생들의 손과 눈, 언어와 사고가 서서히 예민해지는 그 과정을 지켜보는 건 언제나 흥미롭다.
두 번째 수업, 강의실 책상 위에는 A3 종이들이 줄지어 놓여 있다.
학생들은 지난 일주일 동안 각자 하나의 단어를 정해 다섯 가지 서체로 출력하고, 이를 트레이싱해 왔다. Futura, Bodoni, Baskerville, Garamond… 이름은 익숙하지만, 그 생김새를 자세히 들여다본 건 이번이 처음이라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Futura는 단순한 것 같은데 너무 딱딱해서 의외였어요.”
“보도니는 예뻐서 고른 건데, 막상 그려보니 굉장히 까다로웠어요. 선이 갑자기 얇아지거든요.”
처음에는 모두가 그리기를 ‘막일’처럼 여겼다.
하지만 막상 연필을 들고 트레이싱을 해보니, 서체마다 성격이 전혀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단어 하나를 다섯 번 반복해서 그리는 단순한 과제가 어느새 관찰의 기술이 된다.
선 하나의 굵기 변화, 곡선의 유려함, 글자와 글자 사이의 미묘한 간격 차이… 눈으로만 봐서는 지나쳤던 디테일들이 손끝을 통해 다가온다.
한 학생은 Bodoni를 그리며 말했다.
“왜 이 서체를 패션 잡지에서 사랑하는지 알겠어요. 선이 얇았다가 갑자기 굵어지는 그 대비가 시선을 확 끌어요. 정제됐고, 시각적 정체성이 정말 강해요.”
또 다른 학생은 Baskerville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처음엔 좀 밋밋한 줄 알았는데, 자꾸 들여다보게 돼요. 볼수록 매력 있는 서체랄까? 잘 지어진 ‘밥’ 같아요.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이 수업의 목적은 서체를 그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서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의도적으로
디자인된 결과임을, 즉 타이포그래피가 하나의 언어라는 사실을 몸으로 체득하게 하는 데 있다. 조형이
아니라, 어조와 태도를 들여다보는 일. 그게 바로 디자이너의 첫 감각이다.
세 번째 수업부터는 ‘Re-Story’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학생들은 누구나 아는 고전 이야기를 하나 선택하고, 그 이야기를 자신만의 관점에서 다시 구성한다. 단, 이미지 사용은 금지. 오직 텍스트와 타이포그래피만으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가장 먼저 선택된 작품은 『선녀와 나무꾼』이었다.
한 학생은 이 이야기를 ‘돌봄’과 ‘억압’의 이중적 시선으로 해석했다.
“선녀는 하늘로 돌아가고 싶다고 끊임없이 말하지만, 나무꾼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그녀를 붙잡죠. 전 그걸 사랑이라기보다 통제에 가깝다고 느꼈어요.”
이 학생은 선녀의 목소리를 얇고 가벼운 서체로, 나무꾼의 대사는 굵고 견고한 서체로 분리했다. 그 사이의 여백은 점점 좁아지고, 각주는 선녀의 내면 독백처럼 삽입되었다.
또 다른 학생은 『미녀와 야수』를 ‘가스라이팅’의 이야기로 바라봤다.
“처음엔 이상하다고 느꼈던 환경과 인물이 점점 낯익어지고, 결국 야수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이 꼭 정서적 학대 관계와 닮아 있더라고요.”
이 학생은 원문 텍스트의 일부 문장을 인용하고, 심리학 논문과 SNS 속 연애 조언글을 각주로 붙였다. 그리고 본문은 Old Style 서체, 각주는 현대적 Sans-Serif로 구성해 텍스트 간의 긴장감을 시각적으로 설계했다.
『신데렐라』를 고른 학생은 이야기의 수동성을 문제 삼았다.
“신데렐라는 자기 의지보다는 주변의 도움에 의해 상황이 바뀌는 인물이잖아요. 그 구조 자체가 여성에게 요구되던 태도 같았어요.”
이 프로젝트에서는 ‘울고 있는 장면’의 텍스트만 강조되고, 나머지는 아주 작게 배치되었다.
여백의 의미와 시선의 흐름이 그 자체로 비판이 되었다.
이 수업은 글자를 예쁘게 만드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텍스트가 말하는 방식, 독자에게 다가가는 태도, 그리고 감정의 뉘앙스를 시각적으로 번역하는 법을 탐색한다. 글자가 무슨 말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말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서체, 줄 간격, 정렬, 크기, 자간, 각주, 여백, 주석. 그 모든 요소들이 함께 어우러져 말투를 만들고, 말투는 메시지의 온도를 바꾼다.
그래서 타이포그래피는 감정의 언어이고, 디자인은 곧 태도이자 세계관이 된다.
그리고 그 세계관을, 학생들이 저마다의 언어로 발견해 가는 순간. 나는 매번 같은 수업을 새로운 감동으로 바라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