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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옥 Nov 22. 2021

올리브나무 사이로

학교에서 나와 만난 나의 아이들에게

 43. 새우튀김     

 꽤 오랫동안, 소풍을 가게 되면 반장과 부반장은 담임의 도시락까지 싸 와야만 했다. 학부모 입장에서는 ‘무엇을 싸 가야 할까’ 신경이 많이 쓰일 거고 경우에 따라서는 경제적인 부담이 갈 수도 있다. 대부분의 교사 입장에서도 점심 한 끼 대충 먹어도 되는데 학생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교사 스스로 도시락을 싸 가거나, 단체 주문을 하거나, 근처 음식점을 이용해도 될 것 같은데, 아마도 오래전에는 단체 주문을 하기도 어렵고, 변변한 음식점도 드문 데다가 학생들을 인솔하면서 무거운 도시락을 들고 왔다갔다 하기 불편해서 그랬는가 짐작을 해 본다. 

 시절이 많이 바뀌었는데도 이 풍습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고 말았다. 모두에게 다행한 일이다.    

 

 정주 어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담임에게 문의할 게 있었던 참에, ‘지난번 소풍 때 보내드린 새우튀김은 맛이 괜찮았었냐?’고 물으신다. 새우튀김이라니 금시초문이다. 무슨 말씀이시냐고 했더니 여러 선생님들과 나눠 드시라고 정주 편에 꽤 많은 양의 새우튀김을 보내셨다고 하신다.

 정주는 반장도 부반장도 아니었다. 정주 어머니는 아들 간식으로 새우를 튀기시면서, 속 깊은 마음으로 우리들 생각까지 하시고 많이 튀겨 보내셨을 것이다. 정주 어머니는 정성 들인 맛있는 새우튀김을 가득 보냈는데, 한참 시간이 지나도록 담임이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으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으셨겠다.

 배달 사고가 난 것이다. 정주가 반 친구들하고 다 먹어버렸다. 정주는 도대체 무슨 마음이었을까. 반장도 부반장도 아닌데 아이들 앞에서 선생님에게 새우튀김을 내놓는 게 민망했을까. 아니면 그냥 맛있는 것을 더 먹고 싶어 아이들과 새우 파티를 벌인 걸까. 

 아쉽다고 해야 할까. 아마도 정주는 담임 선생님이 새우튀김을 대단히 좋아한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44. 교감 선생님     

 우리 교감 선생님은 배려심 많고 유능한 분이시다. 농업고등학교를 나오고 교육대학을 졸업하신 후에 대학원 공부는 나의 모교에서 하셔서 나를 후배라 하며 각별히 대해 주셨다.  

    

 나는 페스코 베지테리언이다. 고기를 먹지 못한다. 어려서부터 먹어본 적이 없다. 채식주의를 신념으로 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고기가 먹고 싶지 않다. 이런 나를 위하여 교감 선생님은 교사 식당 조리사에게 특별한 주문을 해 주셨다. 고기반찬이 나올 때는 계란후라이를 별도로 해 줄 것과 고깃국이 나올 때는 나를 위해 멸치 된장찌개를 끓여두라고 하셨다. 다른 학교에서는 받아보지 못한 대우다. 먹지 못하는 반찬이 나오면 나머지 것들로 대충 먹곤 했었다. 

 그렇다고 교감 선생님이 나에게만 특별한 보살핌을 주신 것은 아니다. 사고로 돌아가시고 난 후 몇몇 선생님들이 모였을 때, 다들 그 교감 선생님이 자신에게 얼마나 잘 해 주셨는지를 이야기하였다. 성품이 원래 그러신 것 같았다.

 교감 선생님의 둘째 아들이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재수학원에 다닐 때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사모님과 함께 김밥 도시락을 싸셨다고 한다.      

 교사들이 학교 자체평가를 하는 날이었다. 교감 선생님이 교육청에서 보내온 설문지의 어떤 문항을 예로 들며, 그 일을 담당한 선생님을 칭찬하고 높은 점수를 매기셨다.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그것이 기준이 되다 보니 교육청에서 깜짝 놀랄 정도로 자체평가 점수가 높게 나왔다. 매우 총명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분이셨는데 참으로 안타깝게 일찍 돌아가셨다.  

    

 교감 선생님은 강원도 홍천 분이시다. 교장으로 승진하신 후 고향 친구들을 만나러 가셨다. 술 몇 잔 하신 후 밤이 이슥하여 헤어지게 되었다. 친구들은 손을 흔들며 떠나고, 버스 정류장에 혼자 서 계셨다. 걸어가던 친구들이 문득 돌아보니 교감 선생님이 안 보였다. 버스도 오지 않았는데 정류장이 비어 있었다. 친구들이 놀라 달려와 보니 정류장 뒤편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진 것이었다. 트럭이 지나갈 때 무심코 뒷걸음질을 하시다 떨어졌다.

 급히 홍천의 병원에 입원했다가 다음 날 서울의 병원으로 옮기셨다. 첫날에는 크게 위험한 상태가 아닌 듯해 보였고, 교감 선생님조차 가족들이 걱정한다고 알리지도 말라 하셨다는데 그 일로 돌아가셨다.      

 나는 한참 후에 소식을 들었는데, 사람이 그렇게 순간에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슬프고 쓸쓸하였다.                    

 45. 연구교사가 되어     

 연구교사가 되었다. 교사로 오래 남으려면 승진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연구교사가 되면 승진할 때 필요한 가산점을 조금 받을 수 있다. 

 전근 가야 할 해가 되어 희망학교를 써 냈더니, 연구교사를 하겠다면 그 학교로 보내주겠다는 제안이 온 것이다. 힘든 일이라서 현재 그 학교에 근무하는 국어교사 중에서는 아무도 희망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시적으로 지방에서 서울에 올라와 있는 국어과 교사 한 명과 나를 포함하여 외부에서 전입하는 두 명의 국어과 교사가 그해 연구교사가 되기로 하였다. 

 식구들은 만류하였다. 교감이나 교장 또는 장학사가 된다든지 하는 승진에 마음을 두지 말고, 수업하고 담임도 하는 평교사로 마치면 안 되겠냐고 한다. 승진을 하려면 수업과 담임 역할, 행정업무 외에도 해야 할 일이 참 많기 때문이다. 가족을 돌보거나 함께하는 일에는 그만큼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창의성 신장을 위한 국어과 수업 방법 개선'이 우리 연구교사가 해야 할 1년의 과제였다. 국어과 수업 방법을 새로운 형태로 개선하여 수업지도안을 짜고, 서울 시내 400개 정도 되는 공ㆍ사립 중학교에 배포해야 한다. 매월 수업 발표도 해야 했다. 

 연구교사로 발령은 받았으나 어디서 어떻게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우선 시내 중심가 큰 서점에 들러 ‘창의성, 창의력’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교육 관련 책을 여러 권 구해 읽기 시작했다. ‘수업 방법 개선’이라는 제목이 붙은 연수 과정은 전부 신청하여 참석하였다. 3월 수업지도안부터 작성해야 했다. 3명의 연구교사가 매일 회의를 했다. 힘도 들고 시간도 많이 부족하였다. 

 수업 공개를 할 때에는 관내 중학교의 국어과 교사들이 참석을 한다. 아무래도 우리들이 매월 연구수업 발표를 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수업 공개는 줄이고 이미 여러 가지 수업 방법을 연구하고 있던 유명한 강사들을 초빙하기로 하였다. 그 당시에 ‘신문 활용 수업’, ‘마인드맵 수업’, ‘토론 수업’ 등이 시도되고 있었다.     


 1년이 무척 바쁘게, 힘겹게 지나갔다. 보람도 있었다. 연말에는 지도안을 모아 책으로 인쇄하여 보급하였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그해에는 특별히 기억에 남는 학생들이 없었다. 당혹스러웠다. 학생들에게는 오히려 소홀했었던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된다.    

                          

 46. 나, 졸도하다     

 연구교사를 힘들게 마무리했다. 2,3년 계속해서 할 수도 있었지만 3명의 연구교사 모두가 지쳐서 그럴 의사를 가진 사람이 없었다. 

 다른 선생님들에게도 1년간 폐를 끼친 셈이다. 행정업무는 그대로인데 연구과제가 들어왔으니 우리 세 사람이 해야 할 행정업무는 다른 선생님들에게로 분산되어 갔을 것이다. 교사 수가 많은 학교이긴 해도 어쨌든 일이 늘어난 것이다. 게다가 한 달에 한 번씩 공개수업을 할 때마다 학교는 손님맞이 대청소를 하느라 분주했었다. 외부에서 수십 명 때로는 백 명 가까이 국어교사들이 공개수업을 보러 와야 했기 때문이다. 보이스카웃, 걸스카웃 학생들이 동원되어 장소 안내를 하곤 했다.

 다른 선생님들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헤아려 볼 여유도 없이 바쁜 한 해였다.  

   

 두 분의 연구교사는 연구부에 남았던가, 나는 교무부로 옮겨가기로 하였다. 그동안 교무부 일을 많이 해 왔기 때문에 그게 편했다. 

 그런데 교무부장에게는 우리들이 하는 일이 상당히 불편했었던 것 같았다. 논리에 맞지 않는 공정성을 얘기하며, 나에게 다른 선생님들이 먼저 선택하고 남은 행정업무를 맡아야 한다고 한다. 나로서는 아무 상관은 없었다. 어떤 일을 하면 어떤가. 그냥 학교 일인데.

 그래서 하게 된 일이 수업계II, 시상계, 학부모 시감 담당이었다. 전부 보조적인 일이라 처음 부임하는 젊은 선생님들이 주로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일은 좀 많았다.     


 집에 도착하니 수업계I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가 집으로 돌아간 후 교무부장이 이번에는 수업계I 선생님에게 수업계II를 맡아줄 선생님을 젊은 선생님으로 바꾸고 싶으면 바꾸라고 해서, 거절했다고 한다. 윤 선생님이 결정을 하고 집으로 가셨는데 그럴 수는 없다고. 

 이게 무슨 말인가. 교무부장의 속마음이 도대체 뭔가. 나를 골탕 먹이고 싶은 건가. 이러저러한 일을 맡겨서 내가 속상해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이니 또 다른 방법을 써 보는 건가. 갑자기 너무나 불쾌해졌다. 스트레스도 몰려왔다.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 사람에게, 그런 일에 대적하는 최선의 방법은 일을 성실하게 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내가 맡은 일이 효용성 있게 잘 처리되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다짐했다.     

3월이 지나갔다. 3월은 정말 정신없이 바쁘다. 담임으로서 새로 맞이하는 학생들과 해야 할 일이 정말 많다. 교실 대청소도 하고 환경미화도 해야 한다.

 그렇게 4월이 되었다. 퇴근하고 돌아와 집안의 목욕실 앞 서랍장에 기대 서 있다가 사소한 일에 충격을 받고 졸도를 했다. 그동안 학기 초에 있었던 일을 잊고 아무렇지 않게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스트레스가 사라지지 않고 가득 쌓였었는가. 

  마침 목욕실 문이 열려 있어 그쪽으로 넘어갔다. 타일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고 10여 분만에 깨어났다. 깨어나 밖으로 나와서도 정신을 놓고 누웠다, 일어났다를 반복하였다. 그날따라 야간자율학습을 하지 않고 일찍 귀가한 딸과 아직 초등학생인 아들은 춘천에 있는 아빠에게 전화를 걸면서 울고, 어쩔 줄 몰라 했다. 

 같은 동에 가까이 살던 지인 부부도 달려오고, 119를 불러 백병원에 실려 갔다. X-Ray 검사를 했는데 머리에 이상은 없다고 했다. 뇌출혈도 없었다. 하늘이 도와주셨다. 뒤통수에 500원짜리 동전만 하게 머리가 빠져 한동안 나지 않았다. 뒤통수가 살짝 튀어올랐다. 찌그러진 것이다. 어지럼증이 심해서 학교에 갈 수는 없었다. 침상에서 일어날 수도 없어 한 달간 병가를 받았다.

 그때 나는 뇌 손상으로 바보가 되었거나, 죽을 수도 있었는데 살아났다. 한동안 상황의 원인과 결과를 추리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그럴 때마다 약간의 두통도 있었으나, 바보가 되지는 않았다.      

 고등학생인 딸아이는 야간자율학습까지 해야 해서 도시락을 두 개 싸 간다. 어느 날 딸아이가 ‘엄마, 나 오늘은 야간자율학습 없어요.’ 하는데 ‘응’ 하고 대답하면서 여전히 도시락을 두 개 싸고 있다. 야간자율학습이 없으면 도시락이 한 개 필요 없다는 생각을 빨리 떠올리지 못한다. 이런 증상은 어지럼증이 다 낫고도 한동안 지속되었었다. 수업을 하고, 학교 일을 처리하는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다 완전히 회복이 되었다. 머리만 약간 찌그러져 있다. 이것도 머리카락이 가려주니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해가 거의 다 갈 무렵 교무부장이 불쑥 ‘죄송했다’고 말씀을 하신다. 뭐가 죄송하냐고 묻지 않았다. 시간이 좀 지나자 그 말씀을 한 번 더 하신다. 그래도 뭐가 죄송하냐고 묻지 않았다. 그렇게 그해는 저물었다.                                                                           

 47. 장학사가 되려고     

 장학사가 되려고 마음먹었다. 장학사 일이 마음에 들어 열정을 품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정년까지 일을 하려는 내 소박한 소망을 이루려면 장학사가 되어 교감이나 교장으로 승진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평교사가 교감이나 교장이 되려면 연구논문을 쓰거나, 연구교사가 되어 가산점을 받거나, 과학 작품으로 학생들이 발명왕이 되도록 지도하거나, 석사나 박사 학위를 받거나 하면서 점수를 계속 쌓아, 일정 점수가 되어야 자격이 주어진다. 수업과 담임, 행정업무까지 하면서 저런 연구도 해야 한다. 쉬운 일이 아니다.

 지름길로 가기로 했다. 장학사 시험에 합격하고 장학사 업무를 몇 년 하면 교감으로 발령을 받을 수 있다. 

 내 성격에는 시험을 보는 것이 빠른 길이 될 것 같았다. 이미 장학사가 된 분에게 무슨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움을 받고, 시험에 필요한 책을 사 모았다. 두꺼운 책은 두세 개로 나누어 분철도 하였다.    

  

 내게는 편집증적인 성향이 약간 있다. 몰입을 잘한다. 집중력이 뛰어나다. 이것은 대단한 장점일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단점이기도 하다. 아이들 글짓기를 채점할 때도, 생활기록부를 정리하고 있을 때에도 나는 종종 앞 테이블에 있는 전화가 울리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옆에 계신 선생님이 자주 전화를 받게 된다. 내가 일부러 받지 않는 게 아니다. 감사하게도 그 선생님은 나를 그렇게 이해해 주셨다.

 한번은 남편을 따라 광화문 쪽으로 나갔었다. 남편은 세미나에 참석하고 나는 그동안 영화관 <씨네큐브>에서 영화를 한 편 보기로 했다. 영화 상영 시작까지 한 시간쯤 남았길래 근처 카페에 들어가 가져간 소설을 읽기로 했다. 카페에는 손님이 없었다. 구석진 자리에 앉아 소설을 읽기 시작했는데 참 재미있었다. 한참 읽다가 ‘이제쯤 영화관에 가야 하려나’하고 고개를 들었더니 카페에 사람이 가득하였다. 그 사이 대충 30명쯤 되는 사람들이 들어와 시끄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나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장학사 시험을 보겠다고 거기에 매달리게 되었다. 퇴근하고 오면 공부하느라 초등학생 아들아이가 있으나마나한 엄마 때문에 허전해 한다는 것도 몰랐다. 고등학생 딸아이는 나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니 문제될 게 없었다. 

 춘천에 직장이 있어 주말에만 오는 남편은 처음에 책도 사다주고, 분철도 도와주고 했었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나의 사소한 실수나 잘못을 비난한다. 나를 험하게 대하는 것이다. 

 그러한 태도를 참을 수 없게 된 어느 날 ‘요새 왜 그러느냐고, 무슨 일이 생겼느냐’고 남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은 무슨~’ 하더니 한참을 말이 없다. 한참 말이 없더니 조심스럽게 ‘장학사 시험 그만두면 안 되겠냐’고 한다. ‘교사는 학생들 가르치는 일이 가장 중요한데, 담임 역할 하고 수업하면서 평교사로 마치면 안 되겠냐’고 한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한참 울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일이다. 우리 집은 서울과 인천 사이 시골에 있었다. 지금은 번화한 도시가 되었지만 그때는 읍에 해당하는 시골이었다. 

 중학교는 서울로 가기로 하였다. 서울에 있는 명문 학교에 가려고 열심히 공부하였다. 교과서를 모두 통째로 외웠다. 

 그런데 7월 어느 날 서울이 무시험 추첨제가 된다는 정부 발표가 나왔다. 순식간에 목표가 사라졌다. 어린 마음에도 허망했다. 상처도 생겼다. 선생님은 인천으로 갈 수 있으니 마음을 늦추지 말고 계속 열심히 공부하라고 독려하셨다. 

 갑자기 사춘기가 왔다. 내가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살다 마지막에 도달하는 결승점이 뭔가 생각하게 되었다. 죽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왜 사는지 궁금해졌다. 무엇 때문에 열심히 사는지 궁금해졌다. 

 담임 선생님께 여쭈어보았다. 나를 많이 사랑해주신 분이니 뭔가 대답을 해 주실 줄 알았다. ‘열심히 살다 보면 결국 죽는 건데 선생님은 왜 열심히 사시느냐’고 물었다. 선생님은 내가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생각하셨는지, 진지한 대답이나 상담을 해 주시지 않고 그냥 ‘그런 생각 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하셨다.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왠지 부모에게는 묻지도 못했다. 외로웠다.    

 

 나는 혼자 결론을 내렸다. ‘왜 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모든 사람이 결국 죽어 흙으로 돌아간다면 이 세상에 꼭 해야 할 일도 없는 셈이다. 인생에 특별한 순간은 없다. 순간순간이 모여 일생이 된다. 왜 사는가 묻지 말자.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묻지 말자. 어차피 주어진 목숨이니 매 순간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하자.’ 나는 그 후에도 열심히 공부하여 인천으로 진학하고 고등학교도 인천에서 다녔다.     


 내게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세상에서 반드시 성취해야 할 그 무엇이 없다. 살아가면서 선택의 순간을 맞이할 때, 그 순간에 무엇이 가장 소중한지 생각할 뿐이다. 나는 미련 없이 장학사 공부를 그만두었다. 가족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내가 공부한다고 몰입하는 동안 우리 아들이, 내 남편이 불행하다면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책도 내다 버렸다. 그러면서 어쩐지 정년까지 갈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48. 학교 배정     

 아들이 나의 학교에 배정되었다.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날 수밖에 없다. 공립중학교의 교사도 가능한 집 근처로 발령을 내고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아이들도 가능한 집 근처의 중학교에 배정을 하기 때문이다. 

 아들의 담임 선생님은 엄마 학교에 다니면 장점도 많으니 괜찮을 거라고 위로하셨다는데, 아들은 어두운 얼굴이다. 엄마와 같은 학교에 다니기 싫단다. 아이들도 자기를 불편해 할 것이고, 자신도 학교생활이 편치 않을 것 같아 다른 학교로 가고 싶다고 한다.

 엄마나 아빠의 학교에 배정을 받은 경우, 그 당시에는 선택권이 있었다. 배정받은 학교에 그냥 다닐 수도 있고, 다른 학교로 가길 원하면 다시 배정을 해 준다. 나와 아들은 후자를 택했다.

 교육청에 연락하여 다시 배정을 받았다. 처음 배정받은 학교의 옆, 길 건너에 있는 학교다. 그 학교에는 아들과 같은 초등학교를 나온 남학생 중에 배정된 아이는 한 명도 없고, 여학생들만 약간 배정을 받았다. 그러나 아들은 만족하였다. 나의 학교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학교이므로, 부모로서 아들의 학교에 가야 할 중요한 일이 생기면 잠깐 들를 수도 있었다.    

 

 나중에 돌이켜보아도 괜찮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할 수도 있다. 실수에는 대가가 따른다. 우리는 수시로 마주치는 갈림길에서 최선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이 그토록 오래도록 인구에 회자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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