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 『안과 겉』
출근하면서 카뮈의 『안과 겉』을 읽었다.
서문에 카뮈의 좌우명이 나온다.
큰일에 임해서는 자신의 원칙을 세워 그에 따를 것이되, 작은 일에는 그저 자비심이면 족하다.
사람은 타고난 천성의 결함을 메우기 위해서 좌우명을 만든다고, 그는 덧붙였다. 태어난 천성이 비뚤어진 나는 본능적으로 시비에 발동을 건다.
첫 번째 시비.
천성에 결함이 있을 수 있나? 결함이 있는 천성이라고 한다면, 그건 천성이라고 하면 안 된다. 그건 천벌이다. 내 안에 있는 무언가에 하늘을 갔다 붙이려면 적어도 좋은 것으로 한정해야 한다는 게 내 좌우명이다. 더럽고, 절뚝거리고, 역겨운 건 나만 그런 걸로 하자. 하늘은 좀 내버려 두자. 하늘만이라도 좋은 것이 가득하길 바란다. 하늘마저 오염되면 누가 나를 구원한단 말인가.
두 번째 시비.
하늘이 망가트린 성격을 인간의 좌우명으로 메울 수 있을까? 하늘의 뜻을 어찌 인간 따위가 고친단 말인가. 하늘의 것은 하늘에게, 인간의 것은 인간에게!
카뮈의 좌우명을 여러 번 읽으니 세 번째 시비도 일어난다.
큰일과 작은 일은 어떻게 구별될까? 나는 살면서 큰일과 작은 일이 딱 부러지게 구별되는 걸 본 적이 없다.
지난 토요일에도 그랬다. 집에 개가 한 마리 있다. 유기견 입양 센터는 아사 직전에 있던 이놈을 폐가에서 구조했다고 했다.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당시 대충 3~4살 되지 않았겠냐며 없는 기억을 날조하는 표정을 지었다. 누리가 우리 집에서 보낸 세월만 11년이 넘었으니, 대략 열다섯 살 정도인 셈이다.
둘째 딸이 주장한다.
개의 1년은 사람의 7년에 해당한다. 따라서 누리는 현재 백다섯 살이다. 정말 많이 늙었다. 그러므로 건강진단을 해봐야 한다. 사람이라면 벌써 몇 번 했을 거다.
나는 주장한다.
사람이나 개를 병원에 데려가는 이유는, 일상이 불가능할 정도의 통증이나 불편이 있을 경우로 한정해야 한다. 지레짐작에 병원을 찾는다면 건강염려증으로 충만한 현대인들은 의료 권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현재 누리는 잘 먹고, 잘 싸고, 잘 논다. 평균 수명을 훌쩍 넘겨서도 저렇게 잘 지내는 건 축복이지, 걱정할 일이 아니다. 건강검진은 순진한 사람들이 제 발로 순순히 병원으로 오게끔 만든 의료상품이다. 누리 입장에서 보자. 난생처음 보는 사람,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 수 없는 강압적 손길에 이끌려 피를 뽑힌다. 이어서 좁고 어둡고 웅웅 거리는 MRI 기계에 갇힌다. 없던 병도 생기지 않겠는가. 주인이라면 이런 극심한 스트레스로부터 오히려 개를 보호해야 마땅하다. 개를 의인화해 인간과 똑같이 취급하는 게 그 자체로 폭력이다.
나는 말이 너무 많았다. 사실 위 문단의 한 열 배쯤 더 말한 것 같다. 많은 말은 사람 마음을 닫게 만드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설득하는 데는 젬병이다. 갑론을박에 옥신각신까지 더해졌다. 대화를 듣던 아내는 벌떡 자리를 떠났고, 아이는 울었다. 내가 화를 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길고 자세하고 논리적이고 친절하게 설명했는데도 아이는 생각을 바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러한 고집은 평소 아빠에 대한 신뢰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아빠를 무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지엄한 나의 결론이었다. 나는 무시당했다! 그것도 내 자식으로부터! 어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멀쩡한 노견을 강제로 병원으로 끌고 가는 일.
나를 무시하는 아이로부터 권위를 되찾는 일.
카뮈에게 묻고 싶다.
이 일은 큰일인가, 작은 일인가?
나를 주말 내내 괴롭혔던 이 일이 꼬이기 시작한 건, 큰일을 해결하기 위한 자신의 원칙이 없어서인가?
아니면 작은 일을 풀어줄 자비심이 없어서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반백 살을 넘긴 오늘까지 인생의 큰일과 작은 일도 구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인가?
무책임하게, 나는 생각한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오늘도 속수무책이다.
철학책은 늘 머리에서 시작되지만, 결국 마음에서 끝난다.
오늘 아침의 카뮈는 내게 이렇게 속삭였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결국 자비가 필요하다.”
그 자비는 누군가를 향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한 것부터 시작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