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은 군인이셨다.
용감하게 나라를 지켰다. 그걸 인정받아 보훈대상자가 되셨다. 매달 나오는 보훈연금은 왠만한 직장인 월급보다 많다. 옷도 백화점표 고급 브랜드들이다.
한편, 어르신은 구순을 넘기신 치매 환자다.
치매가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 중 하나에서 질병이 된 지는 불과 몇십 년 전의 일이다. 치매 중 가장 잘 알려진 알츠하이머병은 과거에 노인성 치매와 구별되었다. 이 구별은 1970년 후반부터 사라졌다. 인지력 저하는 노화의 일반적인 현상에서 질병이 되었고, 그에 따라 많은 노인들은 치매 환자가 되었다. 중앙치매센터에 따르면 우리나라 85세 이상 어르신 중 40%가 치매환자라고 한다.
젊은 시절 나라의 적과 싸우셨던 어르신은 이제 치매와 싸우고 있다.
치매는 보통내기가 아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던데, 치매 걸린 노인에겐 나라는 고사하고 가족조차 없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자기 자신조차 사라지는 중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 이것보다 더 무서운 적이 또 있을까. 도대체 나는 누구와 싸워야 하는가.
내가 사라지고, 이제 나는 누군가에 의해 처리되어야 할 물건이 됐다는 생각이 행복을 만들 리 없다.
어르신은 지금 삶이 너무 불행하다면서 죽고 싶단 말씀을 입에 달고 사신다. 그러나 정말 지옥 같은 곳에서 형벌 같은 삶을 살고 계신 숱한 어르신들을 알고 있던 그로서는 그동안 꾹꾹 참았던 한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에고, 어르신! 그런 말씀 좀 하지 마세요. 어르신 나이에 자기 집도 없이 월세 걱정, 끼니 걱정, 병원비 걱정하는 분들이 한두 분이 아니에요. 어르신은 집도 있고, 돈도 많고, 병원비도 안 내시잖아요? 이런 분이 없어요. 정말 복 받으신 거예요.”
기적이 벌어졌다.
불행하다, 비참하다, 죽고 싶다던 입에서 무지개가 떴다. 웃으시네? 그는 눈을 의심했다. 무언가 어르신을 웃게 했다. 그게 뭘까?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더니, 설마 남들보다 나은 사정이라니까 마음이 풀어지셨나? 정말? 아, 맞나봐.
사람 마음이란......
미소가 번진 어르신 입에서 왕년 이야기가 졸졸 나오기 시작하는 것 같더니 터진 수도관 에서 나오는 물처럼 콸콸 쏟아졌다. 막을 수가 없었다. 눈에는 자랑스러움이 번쩍였다. 모범생이었던 학창시절, 잘 나갔던 군인 생활, 화려했던 추억들이 어르신의 눅눅한 머리를 벗어나 어눌한 입을 거쳐 방안을 가득 채웠다. 듣는 그도 즐거웠다. 이게 얼마만의 대화인가. 그는 어르신의 안색을 살피며 맞장구와 추임새를 쉴새 없이 넣었다. 잠시나마 어르신은 산 사람 같아 보였다.
“시끄러워!!!”
옆에서 잠자코 계시던 사모님께서 마치 살려 달라는 듯 소리를 지르셨다.
그는 깜짝 놀라 경기를 했고, 어르신은 다시 죽은 사람처럼 변했다. 역시 구순 가까이 되신 사모님 얼굴에는 못마땅하다고 잔뜩 쓰여 있었다. 하긴 귀가 닳도록 들었을 어르신의 이야기에 짜증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가 보기엔 시끄럽다는 괴성은 모처럼 활짝 열린 대화 잔치에 자신만 쏘옥 빠진 소외감이 만든 것 같았다. 이 집의 실질적인 가장은 바로 사모님 아니던가. 초대받지 못한 여왕의 심기는 질투와 서운함으로 그들에게 사형을 언도할 듯 냉정했다.
갑자기 살벌해진 이 분위기를 어찌할꼬.
그는 자신도 모르게 너스레를 떨었다.
“아, 어르신 제가 한 가지 빼먹었네요. 게다가 어르신께선 저렇게 미인이신 사모님까지 옆에 계시잖아요! 하하하!”
그의 웃음소리 때문인지, 미인이라는 칭찬 때문인지, 사모님께서도 그제서야 배시시 웃으신다. 머리칼을 한번 매만지시면서.
이번엔 어르신께서 끙 소리를 내시면서 돌아눕는다.
대화의 중심이 사모님께로 넘어가서 그런가?
정말?
사람마음이란......
하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인간적이고 새로운 이야기를 누군가와 나눈다는 건 포기하기 어려운 것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