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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나 Mar 20. 2021

어제와 결별하기

살아오면서 자주 읽었던 책 중에 하나가 ‘꽃들에게 희망을’입니다. 30, 40대에 이 책을 읽을 때, 속에 있던 욕심이 보이면서 복잡한 마음이 정리가 되는 듯했어요. 날개를 활짝 펴고 가볍게 날아오르는 나비처럼 더 멋져질 나의 속 사람을 기대했었죠.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을 기대하면서, 욕심과 경쟁으로 인한 고단함을 줄이고 싶었습니다. 은퇴한 지금, 경쟁 상황은 줄어들었지만, 내 속의 남아있는 욕심과 갈등은 아직도 풀어나가야 할 과제입니다.

    

그동안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 하면서 나름 세상을 보는 기준이 생겼습니다. 이로 인해 인간관계와 일처리에서 생길 수 있는 실수가 줄어들었죠. 한편으로 내 기준으로 타인이나 상황을 자주 판단하다 보면,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눈은 마비되는 것 같습니다. 모자란 것이 많은 자신의 모습을 잊고 사는 것 같아요. 자신을 체크하는 것, 다름을 인정하는 것 역시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만큼이나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60세가 지나면서 카페나 편의점에서 주문할 때 의사소통에 약간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청력이 약해진 것 같아서 최대한 집중해서 들으려 애를 쓰고 있습니다. 한 때는 초능력 '소머즈 귀'라는 얘기도 들었었는데 약간 서글펐어요. 하지만 이 역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가 나빠지는 나의 청력 때문만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또래들이 알아듣는 속도의 표준어를 20대 젊은이가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더라고요. 억양 때문일까요? 세대가 바뀌면 억양도 변하나요?


한 때 서울을 떠나 부산에 살면서, 어쩌다 방문하는 서울의 변화가 낯설고 서운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 자신은 부산에 적응하여 잘 살고 있었으면서 말이죠. 과거의 익숙한 모습만 붙잡고 싶은 마음이 있었나 봅니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 변한다는 걸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거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아들이 둘 있습니다. 부모와 밀착되어 의존적으로 살았던 이전의 아들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정서적으로 부모와 멀어지는 아들의 변화를 잘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얼마 전에는 예비 며느리를 만났어요. 아들은 이제 나와 가장 친한 사람이 아니고 며느리와 제일 친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부터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처음 해보는 시어머니 역할을 잘하고 싶어요. 우선 아들 부부의 문제에는 가능한 참견하지 않아야겠죠? 아들에 대한 관심.... 이제 내려놓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카톡 프로필에 적어 놓은 글입니다. 윤동주 님의 ‘새로운 길’이라는 시의 일부인데요, 이 글을 보면 삶이 싱싱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어제와 결별한 오늘은 이전과 또 다른 새로운 모습이겠죠. 주름이 점점 늘어가는 얼굴, 기능이 떨어지는 육체를 탓하지 않고 이런 나와 더불어 잘 지내보려 합니다. 이렇게 글쓰기를 하면서 새롭게 맞이하는 하루하루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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