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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나 Sep 27. 2022

노마드를 꿈꾸는 정착민

  주소가 적힌 은색 펜던트가 달린 까만 구슬 목걸이가 기억납니다. 비가 오던 날 대문 앞에서 목걸이가 끊어지면서 구슬이 땅에 떨어져 흐트러졌어요. 울면서 까만 구슬을 줍고 있던 어릴 적 제 모습이 떠오릅니다. 복잡한 서울의 골목길에서 길을 잃어버릴까 부모님이 걸어주신 목걸이였어요. 지금도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발길 닿는 대로 다니다가 만나는 새로운 풍광이 주는 감동을 즐깁니다. 운전할 때만큼은 안전을 위해 익숙한 길을 이용하거나,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길을 따라 가지만, 사실 별 재미가 없습니다.   


  제 전공은 지리교육입니다. 호기심이 많은 제가 어쩌다 선택한 전공이었죠. 교사라는 직업을 갖고 사는 세상에는 조심할 것도, 지켜야 할 것도 많았습니다. 성향이 자유로운 나를 깎고 다듬어가며 적응했죠. 결혼을 한 뒤 남편 직장을 따라 부산으로 이사했습니다. 주변의 반대가 많았어요. 그곳도 사람이 사는 곳인데, 궁금했고 나라고 살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산 생활 초기에는 가끔 나이 드신 분들의 사투리를 알아듣지 못해 답답하기도 했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적당한 긴장감이 있어서 좋았어요. 

     

  낯선 부산에 살면서 두 아들을 최선을 다해 키웠습니다. 국가직 공무원인 남편은 수년에 한 번씩 근무지가 바뀌었습니다. 남편 없이 어린아이들을 키우던 시절이 있었죠. 육아 독박 워킹맘들의 삶이 그렇듯이 집, 직장이 세상의 전부였습니다. 친구와 만남은 물론 취미 활동도 없었고요. 아프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전투를 치르는 듯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잘 버텼어요. 튼실한 몸은 아니지만 단단한 정신무장 덕분에 그 당시에는 아파서 누워 본 적이 없었어요.


  주말부부로 지내다가 미국살이를 계기로 네 식구가 뭉쳤습니다. 우리가 살았던 곳은 헬스장, 실내외 수영장, 스파를 갖추고 있던 신축 아파트였어요. 처음엔 좋아 보였던 아파트가 사실 불편한 점이 많더라고요. 영어를 잘 못하는 이방인이라 실수도 많았습니다. 방학 때는 자동차를 타고 북미대륙횡단 여행도 했습니다. 한 달 동안 하루 평균 700킬로를 달렸고, 매일 생소한 풍경을 만났습니다. 우리가 살던 동네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영어 공부를 하면서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나도 모르게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졌을 거 같아요. 


  이 년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와 복직을 하고 생활이 안정되었을 즈음에, 시아주버님이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습니다. 시부모님께서 많이 의지하던 큰아들이 세상을 뜨자, 작은 아들인 남편이 부모님 집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또 용기를 냈죠. 살고 있던 집을 팔았고, 아이들의 전학을 비롯해 직장 전출 문제까지 복잡했던 일들을 해결하였습니다. 결국 부산에서 경기도 부천의 중학교로 직장이 옮겨졌고, 또 낯설고 새로운 환경 속에서 적응이 시작되었습니다.  


  부천으로 이사 온 지 이년 만에 명예퇴직을 했습니다. 오십 대 초반이었던 나보다 교직을 더 원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마음속 울림이 있었어요. 퇴직 후, 시간 걸리는 반찬을 여유 있게 만들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세탁된 빨래를 시간에 쫓기는 느낌 없이 천천히 털어 너는 것에서도 삶의 만족감이 느껴졌고요. 2014년 인천 아시안 게임에서는 외국인을 도와주는 자원봉사를 했습니다. 또 새터민의 생활 정착을 돕는 활동도 재미있었죠. 아마 새로운 것에 대해 기대와 떨림을 갖고 있었나 봅니다.


  2015년부터 사 년 동안 남편의 근무지였던 경상남도 통영에서 살았습니다. 아침에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일상을 같이 하던 친구들이 있었어요. 나에게 활력을 주었던 통영에서 사귄 고마운 인연입니다. 죽림 해안로 산책, 고성 오일장 가기, 요가 배우기, 우쿨렐레 연주, 라인댄스 배우기, 외국어 공부, 박물관대학 수강, 합창단 활동, 쑥 캐기, 쑥떡 만들어 냉동실에 재워두기, 문화원 강좌 듣기, 통영 부근 섬 찾아가기, 농장에 직접 가서 과일 사기.... 새로운 도전을 많이 했던 시간이었고, 평생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입니다.


  고향이 아닌 부산, 미국, 부천, 통영에 살면서 나 자신을 노마드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정착민처럼 살았던 것 같습니다. 누구도 영원히 머무는 정착민이 될 수 없다는 걸 압니다. 우리 모두 바람처럼 왔다가 떠나는 유목민이라는 것도. 어느 것 하나 내 것인 게 없다는 것도. 주인의식을 강조하는 세상에서, 손님 의식을 가슴에 새깁니다. 그래서 물 한 방울, 바람 한 자락, 흙 한 줌이라도 더 망가지지 않게 하는, 머물다가 떠난 자리가 아름다운 노마드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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