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곳의 주변을 둘러보면, 눈이 닿는 곳 그 끝엔 산이 있었다. 그런 자연환경이 익숙했고, 당연한 것으로 여겼었다. 어쩌다 사진에서 광활한 평원에서 나타나는 지평선을 보면, 가슴이 설레었다. 드넓은 대륙을 달리면서 지평선을 직접 보고 싶었다. 1990년 대한민국이 러시아와 수교를 하였고, 2000년 전후 남북교류가 진행되고 있었다. 막연하게 생각해 오던 시베리아 평원을 기차 타고 달려 볼 수 있겠다는 기대가 생겼다. 육로로만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까지 바로 가는 게 가능할 듯싶었다.
그 당시 집에서 가까운 부산역에서 경부선 열차를 타고, 경의선 철도를 거쳐 중국과 몽고를 지나 시베리아 철도와 연결되는 코스를 그려보았다. 또 다른 루트는 경부선, 경원선 철도를 따라 휴전선을 넘어 함경남북도 해안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연결되는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하바롭스크를 지나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고 싶었다. 비행기나 배를 타지 않고 육로만으로 유럽을 갈 수 있다니.... 내가 사는 땅이 '국경의 섬'이 아니라 대륙과 바로 연결될 수 있는 나라라는 걸 느끼고 싶었다.
지금도 육로만으로 유라시아대륙을 횡단하기는 불가능하다. 차선책으로 북미 대륙 횡단 여행을 시도했었다. 북미 대륙의 중부지방에서 만날 지평선을 상상하며, 북미 동쪽 체사피크만 연안 아나폴리스에서 여행을 시작했다. 평야와 낮은 언덕들이 있는 메릴랜드주와 버지니아주를 거쳐, 산지가 많아서 강원도 경관과 비슷한 웨스트버지니아주를 지났다. 그러다가 켄터키주에 들어서면서 넓은 들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자동차 앞 좌석에서 바라보는 도로의 끝부분, 그 점을 기준으로 양쪽으로 지평선이 펼쳐진다.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서쪽으로 계속 달리면 미주리주, 캔자스주의 대평원이 나타나고, 여기도 켄터키주처럼 대규모 농업지대가 펼쳐졌다. 눈이 시리도록 지평선을 보았다. 지평선에 대한 미련이 남지 않을 만큼. 대평원 지역의 겨울밀 지대는 이미 수확을 마쳤고, 둥글게 말아놓은 건초더미들이 쌓여 있었다. 7월에 부는 돌풍, 소나기, 내리 꽂히는 번개 기둥 등 다양한 기후현상도 경험하였다. 캔자스주의 서쪽부터는 살짝 고도가 높아지기 시작한다. 콜로라도주가 가까워지면서 High Land로 이어지고, 강수량이 적은 탓에 키가 작은 풀들이 자란다. 농업지역은 끝나고 대규모 목축업 지대가 시작되었다.
콜로라도주 주도인 덴버의 북서쪽엔 Rocky Mountain National Park가 있다. 신기습곡산지답게 고도가 높은 산들이 줄지어 있다. 로키 산맥에서 고도 3000m쯤 올라가면 한여름에 만년설을 만날 수 있고, 고산증세도 나타난다. 군데군데 빙하가 녹아 고여있는 차가운 호수도 있었다. 34번, 40번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가면 Dinosaur National Monument가 나온다. 공룡 관련 화석을 자세히 볼 수 있고, 만질 수도 있는 곳이다. 이 공룡 국립공원은 콜로라도주와 유타주에 걸쳐 있다.
유타주 Dinosaur National Monument에서 나온 후,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여기서부터 건조기후에서 형성된 거대하고 신비로운 침식지형들이 나타났다. Canyonlands National Park에 이어, 그 가까이 있던 Arches National Park의 특이한 지형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애리조나주가 가까워지자 인디언 거주지역들이 보였다. 식물도 살 수 없는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내는 그들의 삶이 안쓰러웠다. 애리조나주에 있는 그랜드 캐년은 콜로라도강의 침식 작용으로 형성된 계곡이다. 강 북쪽에 위치한 North Rim에서 바라보는 거대한 계곡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Bryce Canyon, Zion Canyon를 보고, 네바다주의 라스베이거스로 향했다.
후버댐을 건설한 중국 노동자의 임금을 노리고, 사막에 건설된 도박의 도시가 라스베이거스라고 한다. 후버댐의 건설로 생긴 인공호수 미드호 주변의 National Recreation Area을 뒤로하고, 해수면보다 -82m 낮은 데스벨리를 찾았다. 대표적인 건조지형인 선상지가 보였다. 지구상에서 아주 더운 곳으로 손꼽히는 데스벨리의 뜨거운 바람의 맛을 보며 사막을 지났다. 190번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가니 눈앞에 시에라네바다 산맥이 나타났다. 거기서 385번 도로로 갈아타고, 북쪽으로 가다가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만났다. 규모가 어마어마한 바위산과 폭포로 잘 알려진 곳이다. 여름철이었음에도 시냇물이 얼음처럼 차가워서 깜짝 놀랐다.
태평양에 붙어있는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가기 위해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넘어 서쪽으로 달렸다. 오렌지 나무가 많은 걸 보고, 캘리포니아에 왔음을 알아차렸다. 대도시 샌프란시스코는 여름이 서늘했다. 서안해양성기후의 특징이 그대로 나타났다. 금문교, 베이브리지, 언덕을 달리는 전차, 중죄수의 감옥으로 이용했던 작은 섬-알카트라즈를 찾아보았다. 오션비치에 서서 바라보는 태평양이 왠지 친근했다. 부산 집에서 가까운 광안리 앞바다를 지나온 바닷물 같아서 그랬나. 베이브리지를 건너 캘리포니아 주의 주도인 새크라멘토에서 5번 국도를 타고 북쪽을 향했다.
워싱턴주를 향해 가던 중 도로 동쪽에 위치한 Lassen Volcanic National Park는 입구부터 유황냄새가 진동했다. 살아있는 화산에서 압력솥에서 김이 빠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오리건 주를 지나 워싱턴주 시애틀에 도착하였다. 스타벅스 1호점, 빌게이츠 집이 있는 섬을 보았고, Pike Place Market에서 싱싱한 생선을 구경했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이전된 보잉사 공장이 그 당시 시애틀에 있었다. 이곳에서 가까운 Mount Rainier National Park에서는 만년설을 볼 수 있었다. 미국 북서부의 주요 랜드마크이자, 시애틀의 상징인 스페이스 니들에서 시애틀 전경을 내려다본 후 캐나다로 향했다.
캐나다 국경을 넘어서자, 거리 단위가 마일에서 미터로 바꿨다. North 밴쿠버에 머물면서 Capilano River Regional Park를 돌아보았다. 그 숲 속에 있는 Capilano River Hatchery에서는 야생 연어의 성장 과정을 보여주었다. 씨버스를 타고, 바다를 건너 south 밴쿠버의 시내도 둘러보았다. Gastown의 증기시계를 구경한 후, 북적대는 시내를 떠나 캐나다 동쪽으로 출발했다. 동쪽으로 갈수록 고도가 살짝 높아지기 시작했고, 거기 어디쯤인가 과수원에서 먹었던 체리 맛도 잊을 수가 없다.
드디어 로키 산맥의 웅장한 산봉우리들이 나타났다. 기세가 압도적이었다. 미국의 로키산맥보다 캐나다의 로키산맥이 멋있다는 말이 맞았다. Glacier National Park, Yoho National Park, Banff National Park의 만년설로 덮인 황홀한 산지를 보며 캘거리에 도착했다. 오래전 동계 올림픽 개최지로 기억하고 있던 곳이었다. 그냥 한적한 동네라는 느낌이었다. 동진하던 방향을 틀어 남쪽으로 달리니, 북미 중앙대평원에 속한 들판이 나왔다. 미국의 몬태나주를 향해 가다가 캐나다와 미국의 국경을 넘었다.
몬태나주에 들어서서 제일 먼저 만났던 도시는 셸비이다. 농업과 광업이 발달한 이 지역의 주요 도로인 15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주도인 헬레나가 나온다. 도로를 따라 계속 남쪽으로 가다가, 옐로스톤 파크를 가기 위해 90번 도로로 바꿔 타고 동진을 했다. 몬태나 주립대학이 있는 보즈먼을 지나서 남쪽으로 한참을 가니, Yellowstone National Park가 나왔다. 와이오밍주의 북서부, 몬태나주의 남부, 아이다호주의 동부에 걸쳐 있는 세계 최초의 국립공원이다. 입구에 들어서자 화산활동에 의해 분출된 물속의 황 성분이 바위를 노랗게 만들어 놓았다. 진짜 옐로 스톤이었다.
여기는 야생화와 야생동물의 종류가 많다고 한다. 국립공원 내에서 차를 타고 지나다가 위험하다는 붉은 곰을 만났었다. 버팔로라고 불리는 아메리칸 들소 떼도 보았다. 주기적으로 지하수를 내뿜는 간헐천, 부글부글 끓고 있던 머드 웅덩이도 신기했다. 드넓은 Yellowstone National Park의 동쪽 출구로 나오면, 가까운 곳에 코디라는 작은 도시가 나온다. 코디는 로데오의 세계 수도라 불릴 정도로, 서부 개척시대 이미지가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다. 14번 도로를 따라 황량한 평원에 목장들이 가득했다. 몇 시간을 가도 사람은커녕, 작은 마을조차 구경을 못하였다.
산들이 보이면서 Bighorn National Forest에 접어들었다. Bighorn은 산에 사는 뿔이 긴 양이다. 지나다가 산 절벽에 서있던 Bighorn을 여러 번 보았다. 또 여행 중인 샴쌍둥이 형제를 이곳에서 만났는데, 깜짝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표정 관리를 했던 기억이 난다. Bighorn National Forest을 가로지르는 14번 도로를 타고 가다가 90번 도로로 진입했다. 동쪽으로 가다 보면 사우스다코다주의 래피드시티가 나온다. 이 도시 부근에 4명의 미국 대통령 얼굴을 조각해 놓은 Mount Rushmore National Memorial이 있다. 진짜 큰 바위 얼굴이었다.
동쪽으로 90번 도로를 달리다 보면 신비한 지형이 나타난다. Badlands National Park이다. 이곳에는 물에 의해 침식된 황갈색, 갈색, 회색, 노란색, 검은색의 암석층이 있었다.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색깔이었고, 지형 역시 특이했다. 쵸코렛을 생각나게 하는 곳이었다. 사우스다코다주의 최대 도시인 Sioux Falls까지 동쪽 방향으로 달리다가, 여기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29번 도로로 진입했다. 아이오아주 국경에 들어서면 Sioux Falls시가 나온다. 이곳은 광활한 농업지대 한가운데에 있는 미주리 강 연안의 항구도시이다.
남쪽 방향으로 쭉 가다가 80번 도로를 만나서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아이오와주의 주도인 Des Moines을 들렸다가 또 동쪽으로 달렸다. 아이오와주 동쪽 끝, 미시시피강 연안에 위치한 대븐포트시를 지나니까 일리노이주 표지판이 나왔다. 80번 도로를 따라가면, 시카고 남쪽을 거쳐 인디애나주에 들어선다. 이어 미국 제1의 철강업 도시, 게리를 지나고 다시 90번 도로와 만났다. 오하이오주에 진입해서 번잡한 도시인 클리브랜드에 들어서자, 오대호 중 하나인 이리 호가 보였다. 90번 도로가 호수의 남쪽 연안을 따라 이어졌다.
이 도로를 따라 펜실베이니아주 이리 시를 지나고, 뉴욕주에 진입했다. 호수 연안을 따라가다 보니 나이아가라 폭포 부근의 버펄로 시에 도착했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들렸다. 보이지 않아도 폭포가 부근에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리 호에서 온타리오 호 쪽으로 엄청난 양의 물이 떨어지면서 만들어내는 장관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난생처음 본 거대한 폭포에서 나오는 물방울을 온몸으로 맞으며, 배를 타고 폭포 가까이 접근하기도 했다. 온타리오 호로 떨어진 폭포물은 세인트 로렌스강을 거쳐 대서양으로 유입된다.
뉴욕주 버펄로 시를 떠나 계속 90번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가다 보면, 겨울철 눈이 많이 내린다는 시러큐스 시가 나온다. 여기서 남쪽을 향하는 81번 도로로 바꿔 타고 뉴욕 시를 향해 달렸다. 뉴욕에 도착하여, 911 테러가 났었던 무역센터 자리에 찾아갔다. 2001년에 일어난 사건의 현장을 2002년에 보았던 것이다. 뉴욕에서 4시간 거리에 있던 집이 아주 가깝게 느껴졌다. 서둘러 95번 도로를 타고 아나폴리스에 있는 집으로 향했다. 별 사고 없이 북미 대륙을 한 바퀴, 12,000km를 돌아 집에 도착했다. 얼마나 뿌듯하던지....
시간이 흘러 육십 중반의 나이가 되었다. 북미 대륙 한 달간의 여행을 돌아보니, 내 일생에 다시없을 모험의 순간들이었다. 지도책 한 권에 의지했던 여행이었다. 인터넷 예매도 없었던 시절, 몸으로 부딪쳐 의식주를 해결했었다. 그 순간순간이 두 아들에게 값진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겁 많은 내게 용기를 주며, 여행을 이끌었던 남편에게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