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가까운 국내외 소도시를 다니는 여행에 관심이 생겼다. 어쩌다 저렴한 항공편이 나올 때, 우리 부부는 여행 떠날 준비를 한다. 사실 가성비, 가심비가 큰 배낭여행을 좋아하니까, 뭐 크게 준비할 것도 없다. 퇴직 후, 조용히 걸어 다닐 수 있는 인적이 드문 소도시를 찾아다니는 여행을 하고 싶었다. 여행의 목적지라는 게 그냥 걸어 다니다가 어떤 순간, 감동을 받아 눈길이 머무는 곳이 아닐까. 편하고 가볍게 다니는 여행이라서, 출발할 때 배낭의 무게나 돌아올 때 배낭의 무게가 비슷하다.
얼마 전 한 달 동안 서귀포, 다카마쓰, 가오슝을 다녀왔다. 서귀포는 2박 3일의 짧은 여행이었다. 여행이 만족스러워서 그런지 제주에서 머물렀던 시간이 실제보다 길게 느껴진다. 이번엔 서귀포를 중심으로 서쪽에 7 올레길과 그 동쪽 6 올레길을 걸었다. 아름답다고 소문난 7 올레길의 바닷길을 상쾌한 기분으로 걷다가 법환포구 부근에서 최영 장군의 기념비를 발견했다. 고려 말 최영장군이 1374년(공민왕 23년) 제주를 지배해 오던 몽골군들을 그 앞에 보이는 ‘범섬’에서 완전히 진압했다는 역사의 현장이다.
서귀포 해안가를 산책하다 우연히 진시황의 불로초 전설이 살아있는 서복전시관에 들어갔다. 중국인 '서복'이 제주도로 불로초를 찾으러 왔었다고 한다. 그의 존재를 알리는 글자가 서귀포 부근 바위에 새겨져 있다. '서복이 귀향한 포구'라서 서귀포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서귀포라는 지명이 정말 이렇게 유래되었다는 게 맞을까. 일본에 있는 서복의 흔적을 찍은 사진도 본 기억이 난다. 과거 시진핑 주석이 저장성 대표로 서복전시관을 방문했을 때, 그의 이름을 써놓은 방명록도 있었다. 왜 이리 제주도에 관심이 많을까.
숙소에서 가까운 서귀포매일올레시장을 저녁마다 갔다. 요즘 제철이라는 방어회를 먹었는데, 그리 만족스럽진 못했다. 오메기떡, 감귤과즐, 귤 등을 사서 재 두고, 몸무게를 생각해서 조금씩 여행 기간 내내 먹었다. 고기국수는 두 차례나 먹었는데도 또 먹고 싶어 진다. 일인용 뚝배기에다가 해물을 푸짐하게 넣어주는 식당도 찾아갔었다. 주인이 잡은 싱싱한 갈치로 만든 튀김은 생선살이 달게 느껴질 정도로 맛있었다. 성산 일출봉 매표소 앞 가게에서 먹었던 감귤조림이 뿌려진 아이스크림은 근래 먹었던 아이스크림 중 최고였다.
정방폭포 부근의 소정방폭포를 지나면 오래전 우리 부부가 신혼여행을 왔었던 서귀포 칼 호텔이 있다. 호텔 안쪽으로 이어진 올레길 역시 조용하고 아름다웠다. 오조포구에서 오리 떼 무리를 보며 걸었던 길도 참 평화로웠다. 올레길 1-8코스에는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이 있다. 4.3 사태로 완전히 불에 타 사라진 슬픈 동네였다. 인적 없는 집터에 까만 현무암 벽들만 남아 있었다. 지금은 스산한 기운이 감돌고 있지만, 동네를 소개하는 그림 속 모습은 포근하고 평화롭기 그지없다.
일본 시코쿠섬 북쪽에 있는 다카마쓰는 우동의 고장이다. 이 부근에 '사누키'라는 곳에서 사누키 우동이 시작된 듯하다. 그 많은 우동 가게에는 지금도 우동을 먹는 사람이 많겠지. 다카마쓰를 다녀온 후 질려서 지금은 우동을 쳐다보지도 않고 있다. 그곳의 오래된 기차를 타면 60년대로 시간여행을 온 기분이었다. 덜컹거리는 고토덴 열차를 타고 붓쇼잔 온천에서 온천욕을 즐기고, 고토히라궁에도 갔었다. 마을 입구의 무료 온천 족욕탕에서 편하게 쉬기도 했고, 동네 식당에서 일본 가정식으로 색다른 식사를 했다.
<가가와현 고토히라>
<다카마쓰성 해자>
<리츠린 공원>
다카마쓰의 리츠린 공원은 아기자기하고 일본스럽게 꾸며진 아름다운 공원이다. 이 공원에서 북쪽으로 몇 정거장 떨어진 항구 부근엔 다카마쓰 성이 있다. 성 주변에 있는 큰 규모의 해자가 인상적이었다. 항구에서 배를 타고 세토나이카이(내해)를 건너 찾아간 쇼도 섬은 올리브를 많이 재배하는 곳이었다. 혼슈섬과 시코쿠섬 사이의 세토나이카이를 지날 때, 옆에 앉은 중국인이 시끄러워 선실 밖으로 나와 있었다. 세계지리 공부할 때 잘 외워지지 않고 낯설었던 '세토나이카이'라는 바다가 눈앞에서 출렁거리고 있었다.
가오슝은 오래전 가족과 여행한 적이 있고, 친구들과도 놀러 갔던 곳이다.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었다. 이곳은 우리나라의 부산처럼 대만 남쪽에 위치한 항구도시다. 북쪽 타이베이에 비해 기온이 높아서 겨울에도 낮엔 여름처럼 덥다. 늦은 밤에 도착한 우리는 공항 편의점에서 충전식 교통카드인 이지카드를 사서, 지하철 MRT를 타고 숙소에 도착했다. 다음 날에도 교통카드를 이용해 버스와 배를 타고 치친섬에 갔다. 몇 년 전에 왔을 때, 더워서 제대로 보지 못했던 섬 구석구석을 전기 자전거를 타고 바람을 맞으며 꼼꼼하게 돌아보았다.
<치친섬 >
숙소에서 가까운 가오슝 역에서 기차를 타고 가오슝의 북쪽에 위치한 대만 제2의 도시 타이난에 갔다. 대만에서 네덜란드를 몰아낸 명나라 때, 이후 청나라 때도 대만의 수도는 타이난이었다. 그러다 일제 때 일본과 거리가 가까운 타이베이로 수도가 옮겨졌다. 타이난은 네덜란드가 질란디아 요새를 세우면서 건설되기 시작한 도시인데, 다른 도시에 비해 대중교통 체계가 미흡한 듯하다. 기차역과 연결되는 지하철이 없고, 시간을 지키지 않는 버스 때문에 곤란했었다. 하지만 친절하게 안내해 주던 사람에 대한 좋은 기억이 남아있다.
타이난 기차역에서 버스를 타고 안핑트리하우스로 갔다. 이곳은 19세기 영국상인이 설립한 곳이다. 찻잎, 아편, 설탕 등을 교역할 때 사용된 창고였는데, 일제 때는 일본 소금회사에서 사용하였다고 한다. 광복 후 방치된 건물을 뱅골보리수(반얀트리)가 삼켜버려서, 지금은 괴기한 모습을 한 관광 포인트가 되어 있다. 길 건너 가까운 곳에 있는 질란디아 요새가 있다. 그 부근을 지나가다 우연히 우육면 찐 맛집을 만났다. 그동안 몇 차례 먹었던 우육면과는 달랐다. 우육면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인 줄 처음 알았다.
더위를 무릅쓰고 우리나라의 한옥지구 같은 느낌의 '선농지에'를 찾았다. 청나라 때 가옥을 예술가와 청년 사업가들이 빈티지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거리이다. 더운 날씨에 차가운 밀크티를 들고, 길지 않은 고풍스러운 길을 걸었다. 날씨 때문인지 타이완에서는 시원한 흑당 밀크티를 자주 마셨다. 우리나라에서 먹던 것보다 달지 않아 부담이 없었다. 까르푸에서 구매한 밀크티 티백을 집에 와서 먹어보니, 이것 역시 달지 않았다. 우리나라 카페 음료수의 단맛이 너무 강한 건 아닌지.
타이난을 방문한 다음 날, 가오슝 동쪽 방향으로 기차를 타고 핑둥시에 도착했다. 거기서 버스를 타고 원주민 마을 찾아가는데, 갈수록 산세가 험해졌다. 차창 밖으로 수확을 마친 바나나 농장들도 보였다. 대만 원주민 출신 며느리를 둔 친구의 사돈이 살고 있을 듯한 쉐먼이라는 곳에서 버스를 내렸다. 여행 정보를 친절하게 알려준 버스터미널 직원을 만나서 기분 좋게 여행을 시작하였다. 경사지에 아기자기하게 형성된 동네에는 인적이 없었다. '대만 원주민 문화공원'에 들어가서야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고산족'이라고 알고 있던 대만 원주민이 원래부터 높은 산지에 거주했을까. 명, 청나라 시대부터 중국 공산당에게 쫓겨 들어온 본토인들까지, 이들에게 밀려서 산지에 살게 된 건 아닐지. '원주민 문화공원'에는 다양한 종족들의 생활 방식이 소개되어 있었다. 또 높은 산지에 특색 있는 원주민 거주지들이 실재처럼 생생한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공원 안에서 무료로 운행되는 관람차를 타고, 이곳저곳 찾아다닐 수 있었다. 초록 배경의 멋진 자연경관 덕분에 눈이 정화된 기분이었다.
원주민 문화공원 부근의 원주민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 옆에 있는 작은 보건소 직원이 점심을 포장해서 가져가는 걸 보니 맛집 같았다. 친절한 식당부부가 만들어주던 음식은 보기보다 맛이 좋았다. 식당이 깨끗하지 않고,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국수, 고기덮밥 다 입맛에 맞았다. 주문한 반찬 두 가지 중 하나는받고 보니 전통차였다. 재료도 모르는 시원 달콤한 전통차 한 병으로 더위를 달랬다. 음식값으로 85 대만달러가 나왔다. 사천 원도 안 되는 돈인데, 여기서 5달러를 깎아주는 주인의 인심이 고마웠지만, 미안한 마음이 오래갔다.
이 날 쉐먼에서 동북동 방향으로 더 깊은 산지 원주민 마을인 우타이향을 가려고 계획했었다. 루카이 족이 사는 우타이 향 마을을 보고 싶었지만, 버스 노선이 적어서 다시 쉐먼까지 나오기에는 시간이 빠듯했다. 다음 날이 출국일이어서 우타이 향은 다음 기회에 가기로 하고, 편하게 마음을 접었다. 쉐먼에서 가오슝을 가려고 핑둥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올 때는 우리를 포함해서 승객이 세 명이었는데, 핑둥역을 가는 동안 버스 승객은 우리 두 사람뿐이었다. 이런 버스 여행의 맛도 꽤 괜찮았다.
출국 날 오전, 가오슝시립역사박물관을 갔다. 알차고 다양한 전시물이 있는데, 설명의 대부분이 중국어뿐이라서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2층 전시실 중 일본 어느 지역의 축제를 소개하던 곳은 아주 화려하고 재미있게 꾸며 놓았다. 확실히 대만 사람들은 일본에 대해 친근감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전시물 중 16, 17세기 지도를 보니, 서양 배들이 대만을 거쳐 일본으로 가는 여러 뱃길이 그려져 있었다. 대만과 일본이 오래전부터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오슝시립역사박물관>
점심을 먹은 후 비행기를 타고, 잠깐 졸았나 싶었는데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지하철을 타고 역 네 개를 지나니 집 동네다. 맘도 가볍고 몸도 편했던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