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벅지와 등짝 사이
퇴근이 늦어졌다.
자주 있는 일이었다.
사방이 사람으로 막힌 공간에서 하루를 보내다 마침내
텅 빈 주차장 사이를 걷게 되었다.
그제야 어깨가 무거워져있음을 깨닫는다.
차에 올라타 시동을 켜자 라디오가 흘러나왔다.
가볍고 정돈된 mc의 목소리들을 들으며
천천히 차를 몰아 주차장을 빠져나오자 장마 중인 하늘이 보였다.
오랜만에 본 하늘은 멍든 것처럼 푸르스름했다.
라디오에서는 비즈(bise)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프랑스 남부, 중남미에서는 볼뽀뽀(비즈)를 하는데
이 비즈 문화가 성적인 욕구 같은 것을 해소한다고 했다.
그 얘길 듣자 문득
오래전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인턴 시절,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온 친구들이 있었다.
제니와 파블로라는 친구였다.
제니는 키가 작고, 자기 주장을 잘하는 친구였다.
파블로는 키가 매우 컸고 유머러스했다.
유머가 지나친 나머지(?)
종종 자신의 민머리를 유머의 소재로 삼기도 했었다.
제니와 파블로는 종종 비즈를 했었는데,
유교문화권에서 자란 나로서는 어색한 광경이었다.
그들과 꽤 친해졌다고 생각한 어느 날,
제니는 나에게 비즈하는 법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비즈를 왜 알려주지?'라는 생각으로
멀뚱히 서있자
제니는 그런 나를 끌어당겼다.
나보다 키가 훨씬 작은 제니의 체취가 느껴질 만큼
얼굴이 가까워지자 귀에서 ‘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친밀한 행위였다.
나도 얼른 따라서 해봤지만,
쪽이 아니라 쭙같기도 했다.
쭙에서 스며나오는 경직됨과 어색함을 제니도 알아챌 것 같았다.
스킨십이 익숙하지 않은,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었다.
입사 후 한달쯤 지났을까,
팀내에서 회식을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팀원들과 낯을 가리는 팀장,
회식하기에 좋은 조건은 아니었다.
회식 장소는 주차할 곳이 없는 번잡한 시내 한가운데였다.
결국 집에 들러 차를 두고 가기로 했다.
집에 도착하자 가족들이 모여있었다.
회식이야기를 꺼내자, 다들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중 동생은 이제 회식도 하냐, 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회식이 뭐 별거라고,
툴툴대며 얼굴에 팩트를 찍어발랐다.
술을 마셔도 티가 나지 않을 만큼.
그리고 마침 집에 있던 이모의 차를 얻어타고
회식 장소인 고깃집으로 향했다.
진한 고기의 냄새와 연기가 뿌옇게 차 있는
고깃집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의 옆으로 두 자리가 비어있었다.
마치 아무도 앉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질 정도로
그의 옆자리는 깨끗이 비어있었다.
의아했다.
‘왜 옆자리만 두 개가 남아있지?’
그 의문은 곧 풀렸다.
그는 빈잔에 계속 소맥을 채웠다.
잘 마시네, 잘 마시네, 칭찬까지 곁들였다.
때로 그의 권위를 과시하는 에피소드들을 풀어냈고, 종종 욕을 섞어 말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스스로 목끝까지 술을 밀어넣어 알딸딸해지자,
슬슬 나의 몸과 가까워졌다.
그에게서는 비싼 향수 냄새가 풍겼다.
그러다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가 나의 등을 슬쩍슬쩍 쓰다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 결국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그는 한 손으로는 나를 만지고,
다른 한 손으로는 다른쪽에 앉은 직원의 손목을 잡았다.
그 여직원은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내 앞에는 평범한 남자 직원과 평범한 남자 팀장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그와 나를 보지 않았다.
다른 직원들은 나를 안쓰럽게 쳐다봤다.
수치심이 가득 차올랐다.
‘무슨 환영회식이 이따위람.’
그의 손은 피하기 위해,
일부러 몸을 비틀어 손을 떨어뜨렸다.
상사는 나를 멍하니 쳐다봤다.
‘니가 뭔데?’라는 표정으로 한참동안.
왜 이렇게 됐을까.
분명 우리 사이엔 어떤 라포도 형성되지 않았는데,
그는 나에게 왜 이렇게 다정하고 가까운 걸까.
허공에 붕 뜬 기분이 되었다.
그를 탓하고, 어쩌면 나를 탓하다
결국 허무한 기분이 되어 고깃집을 나왔다.
고깃집과 멀어지자 같이 걷던 직원들은
그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계속 잡으시는 거 봤어요.”
“너무 심하시더라.”
그런 얘기들, 안 지 한 달도 안 된 사람들에게 듣기엔
다소 불편한 대화였다.
한편으론 그렇게 터놓고 얘기해줘서 고마웠다.
하지만 결국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타고
지하철로 환승해 먼 길을 돌아가는 길에
예전 직장에서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고급 노래방에서 나이든 상사와 몸을 맞대고
노래를 부르던 직원의 뒷모습을.
그때와 상황은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 장면과 다를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기운이 빠졌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는 한동안 모습을 나타내지 않다가,
어느 순간 다시 나타나
나를 은근히 몰아세웠다.
업무를 분장받지 못하고 있고
어쩌면 이것이 바로 직장내 괴롭힘일지도 모르겠다는 확신도 들즈음
그는 내 자리 주변을 알짱거리면서
“나는 마음에 안들면 일을 안줘. 실제로 그랬어. 진짜야.”
틈내어 말했다.
그런 식으로 권위를 내세운 말을 하는 걸 좋아했다.
그 말이 나를 향한 것이라는 것은 알 수 없지만, 숨이 턱 막혀왔다.
시간이 흘러 그는 그렇게 자랑하던 권위를 내려놓고
구석진 곳에서 홀로 시간을 때우게 되었다.
더는 그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원치 않는 불편한 상황은 늘 일어난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거리를 두고,
‘그런 일’이 생기면 잘 대처하고,
마지막으로 ‘그런 일’을 의연하게 넘기는 일이 숙제로 남는다.
모두 한 사람이 해야 할 일이다.
마무리하자면, 그 일이 있은 후로
그는 더는 나를 만지거나 쓰다듬지 않았다.
물론 그에 대한 경험치가 모두에게 쌓인 이유로
그의 옆자리는 회식 때 마다 깨끗하게 비어있게 되었다.
그의 스킨십이 어떤 이유에서 발현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프랑스 남부나 중남미에서
실컷 비즈를 하며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