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는 사람들이 남기는 것
“저 퇴사해요.”
조금은 부끄러운 듯이, 조금은 미안한 듯이 내뱉는 그 한마디에 설레고 말았다.
내가 정말 듣고 싶은 말이었다. 그저 단 한마디, ‘퇴사해요.’
이 한마디에 그날의 번뇌가 누그러질만큼 좋았다.
나를 꿈꾸게 만드는 말을 하고서는 ‘하하하’, 웃는 그의 얼굴을 보니 조금 배가 아팠다.
그리고 동시에 어딘가 의기양양하고 홀가분해보이는 그의 기운이 내 마음을 울렁이게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저녁 먹었어요?’ 라던가 ‘예쁘다.’라는 다정한 말들로는 더는 움직이지 않던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20대인 그는 성실했고, 자신의 일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업무까지 챙기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은행에 정규직으로 취업하게 되었다.
진심으로 잘된 일이었기에 기뻐하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는 그런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를 더는 볼 수 없다는 건 아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슬슬 외면하고 있던 질문이 떠올랐다.
그가 떠난 자리를 누군가는 채워야 한다.
문제는 그게 누가 될 것인가하는 문제였다.
그가 맡던 일은 사람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그는 그 일이 ‘힘들다’, ‘좋다’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때때로 전화를 받는 그의 목소리가 지쳐있거나, 화나 있었으니
어떤 심정으로 일하고 있을지 유추할 뿐이었다.
팀장은 이 사건에 대해 일절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이 상황이 분명 누군가에게 난처한 상황임을 인지하고 있기에
아무런 개입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음이 명백했다.
퇴사예정자인 그는, 허탈하게 웃으며
"팀장님이 이 업무 하신다는데요?"라고 말했다.
어, 이거 참, 제대로 익숙한 상황이다.
이전회사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있었다.
프로젝트 담당자가 사업정산이 다가오는 시즌에 퇴사를 해버린 것이다.
퇴사예정인 그는, "대표님이 자기가 다~ 알아서 할거라고 하는데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표는 바쁘다는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러더니 어느날 느닷없이 저녁 7시에 나에게 전화를 했다.
프로젝트 발주처에서 용역결과보고서를 왜 안내냐고 성화를 냈다는 것이다.
"나도 모르고 있었어. 걔가 이런 게 있다고 말을 안했어. 이거 너가 좀 써줘야할 것 같아."
이미 퇴사한 사람을 책망하며 투덜대는 그는 한 회사의 대표였다.
다음날 대표는 ‘내가 해봐서 아는데, 별거 없어.“ 라며 나에게 15페이지 보고서 샘플을 던져주었다.
하지만 발주처로부터 욕을 된통먹었다.
"누가 보고서를 15페이지 짜리로 제출해요!?"
밤새 대표 욕을 하면서 보고서를 다시 작성했다.
그리고 마침내 1주일 동안 100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를 만들어냈다.
내가 주도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매 순간이 창작의 연속이었다.
사업을 요리조리 뜯어보며, 재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나 놓친 부분은 없는지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를 시전했다.
다행히도, 수년간 ‘자소설’ 작가로 활동한 경험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대표는 그동안 발주처 담당자로부터 오는 연락을 모조리 피하며, 나를 독촉해댔다.
빌어먹을 인간.
그렇게 사업보고서를 마무리하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퇴사했다.
계약기간 만료였다.
정이랄 것도 없었다.
명절에 대표는 선물이랍시고 내게 참치캔 몇개를 주었다.
다른 직원들에게 제대로된 선물을 줬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되었다.
계약직 직원들에게는 명절 선물을 주지 않았다.
정직원 사기를 돋우기 위해서라나 뭐라나.
시간이 흘러 나는 공공기관의 정직원이 되어 그때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조금 더 늙었고, 조금 더 병들었다.
일은 왜 항상 과도하게 주어지는가.
팀장은 '너희들끼리 업무 분장 정해.'
그 한마디를 했다고, (그마저도) 전해들었다.
결국, 퇴사자의 인수자는 내가 되었다.
그녀가 하던 일과 내가 하던 일이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2인분의 몫을 1명이 하게 된 것이다.
퇴사를 앞둔 그는 남은 기간동안 병가를 냈다.
갑작스런 사고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회사에 온 그는 초조하고 약간 짜증이 섞인 기색으로 물었다.
“대리님, 업무 중에서 궁금한 거 있으면 말해주세요.
제가 알려드리려는 거랑, 대리님이 궁금하신 거랑 다를 수 있잖아요. ”
그는 어떤 걸 인수인계 받고 싶은지 재촉했다.
아무 생각이 없다. 어떻게든 되겠지. 아니면 망해버리던가.
그렇게 나는 마음의 준비가 하나도 되지 않은 채,
껍데기뿐인 인계자가 되어 짧은 인수인계를 받고 그와 헤어졌다.
그때의 속마음이야 뭐, 쌍욕뿐이었지.
‘이 x같은 인생, 그럼 그렇지.’
당시 회사는 신입사원인 나에게 가이드 라인을 따로 주지도,
새로운 업무가 추가되는 것에 어떤 첨언을 덧붙이지 않았다.
나는 그저 바통터치를 받기 위해 출발선에 선 선수가 달리기 시작하는 순간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리고 뛰기 시작한 순간조차 회사는 내게 별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감고 달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