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월부터 3월은 가장 바쁜 시기다. 디자인해야 할 것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줄을 서 있다. 클라이언트들이 한 해의 사업 계획을 세우면, 우리는 그에 맞춰 영업 도구와 각종 마케팅 자료를 제작해야 한다. 특히 이 시기에는 변경 사항도 많아 작업을 완료해도 수정을 반복한다. 간단한 문구 수정에서 원고 교체까지 다양한 변경이 이루어진다. 즉각적인 실행 능력이 더욱 중요한 때다. 급한 일정에 맞추다 보면 퀄리티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야근은 필수다. 결과물은 디자이너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내 것에 대한 자존감이 높은 디자이너일수록 밤샘 작업이 잦아지는 이유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의 작업이기 때문에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밤늦게까지 고민한다. 사실, 조용할 때 혼자 집중해서 작업할 때 좋은 디자인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디자인 시안 리뷰를 할 때 내가 늘 하는 말이 있다.
“이 디자인 비용이 얼마죠?
그런데 지금 디자인한 것이 우리가 청구하는 금액에 맞다고 생각하나요?”
클라이언트가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어서 전문가에게 맡겼다면, 최소한 비용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늘 묻는다.
“지금 디자인한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
물론, 디자이너만의 문제는 아니다. 오늘 요청하고 내일 시안을 받기를 원하는 클라이언트도 문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을의 입장에서는 해내야 한다. 우리는 전문가니까. 문제는 속도만 강조되다 보니 본질적인 디자인 프로세스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경력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업무가 가능하지만, 신입이 이렇게 디자인을 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디자이너들과 일하다 보면 재미있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신입이든 경력자든 아이디어 스케치를 하는 모습을 좀처럼 보기 어렵다는 거다. 사실 나도 경력자들에게 이전 회사에서도 안 하던 스케치를 갑자기 요구하기가 눈치 보인다. 그래서 스케치 먼저 합시다란 말은 속으로 한다. 요즘은 대부분의 디자이너가 스케치 없이 컴퓨터로 바로 디자인하는 게 익숙해진 것 같다. 사설 학원에서 배운 디자이너들도 썸네일 스케치는 거의 하지 않고 바로 컴퓨터 앞에서 무엇인가를 시작한다.
그래서 나는 신입 디자이너들을 만나면 꼭 아이디어 스케치부터 시작하라고 이야기한다. 스케치가 얼마나 좋은지 경험상 잘 알기 때문이다. 머릿속 생각을 종이 위에 펼쳐놓으면 사고가 더 넓어지고, 동료들과 금방 피드백도 주고받을 수 있어서 아이디어가 점점 발전하게 된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아"라는 식의 두루뭉술한 평가 대신, 왜 그 아이디어가 적절하지 않은지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습관도 들게 된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디자이너로서의 사고력도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팀원들과 소통하면서 서로 배우는 점도 많아진다.
아이디어 스케치, 왜 사라졌을까?
디자인 작업 방식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예전에는 디자인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연필부터 들었다. 개념을 정리하고 썸네일 스케치를 그리는 게 첫 단계였는데, 사수들은 컨셉을 설명하고 우리는 여러 아이디어를 탐색하면서 최적의 방향을 찾아갔다.
이런 과정이 필수였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지금처럼 이미지를 쉽게 구할 수 없었다. 원하는 이미지를 찾으려면 충무로까지 직접 가서 필름을 빌려와야 했고, 그걸 또 드럼 스캔으로 디지털화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미지 한 장 확보하는 데도 시간과 비용이 꽤 들었으니, 아이디어가 확실히 정해진 다음에야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디자이너들의 작업 방식도 많이 달라졌다. 연필을 들고 스케치북을 펼치는 대신, 컴퓨터 앞에 앉아 먼저 이미지부터 찾아보는 게 일반적이 되었다. 찾은 이미지를 토대로 디자인을 시작하는 거다. 얼핏 보면 효율적으로 보이지만, 이런 방식에는 아쉬운 점이 많다.
내 경험으로는 순서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디자인의 퀄리티가 확연히 달라진다. 먼저 디자인 컨셉을 차근차근 정리하고, 전체적인 방향과 컬러 등 중요한 요소들을 꼼꼼히 체크한 다음 작업을 시작하면 결과물이 훨씬 탄탄해진다. 빠른 게 늘 좋은 건 아닌데, 우리는 가끔 이 단순한 진실을 잊고 지나가는 것 같다.
아이디어 스케치는 디자인 과정에서 정말 특별한 역할을 한다.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창의적인 생각을 펼치고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 도구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스케치의 힘이 여러 면에서 드러난다.
우선 머릿속 아이디어를 빠르게 시각화할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다. 복잡한 디자인 프로그램을 켤 필요도 없이, 연필과 종이만 있으면 바로 시작할 수 있다. 이렇게 자유롭게 그리다 보면 생각의 흐름이 끊기지 않고, 다양한 아이디어가 술술 나오게 된다.
재미있는 점은 머릿속으로만 구상했을 때는 완벽해 보이던 아이디어의 허점이 스케치를 하면서 드러난다는 거다. 초기 단계에서 이런 문제점들을 발견하면 수정하기도 훨씬 수월하다. 말로 설명하려면 한참 걸릴 내용도 스케치 한 장이면 팀원들과 금방 공유할 수 있고, 클라이언트와 이야기할 때도 한결 수월하다.
또 하나 좋은 점은 디자인의 발전 과정을 모두 기록할 수 있다는 거다. 처음에 어떤 생각으로 시작했는지, 어떻게 발전했는지,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 이 모든 과정이 스케치에 담긴다. 나중에 비슷한 프로젝트를 할 때 이런 기록들이 정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리고 가장 매력적인 건, 손으로 직접 그리는 동안 예상치 못한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는 거다. 때로는 실수로 그린 선 하나가 새로운 영감이 되기도 하고, 무심코 한 낙서가 독특한 디자인 요소로 발전하기도 한다. 이런 우연한 발견들이 디자인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이처럼 아이디어 스케치는 단순한 과정이 아니라, 디자인의 방향성과 완성도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다. 하지만 현대 디자인 환경에서는 점점 더 생략되는 추세다. 모든 디자이너에게 강요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디자이너로서 기본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디자인하기 쉬운 시대에 살고 있지만 디자이너라면 기본을 잊지 말자
클릭 한 번으로 쉽게 디자인을 할 수 있는 시대지만, 전문가라면 기본을 잊지 말자. 나는 27년째 디자인을 하면서 지금도 아이디어 스케치를 한다. 가끔 책상 정리를 하다가 꺼내보며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 하며 감회에 젖기도 한다. 신입 때부터 모아 온 아이디어 스케치북을 소장하고 있는데, 때때로 들여다보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곤 한다.
더 와닿게 이야기해 보자면, 디자인을 글쓰기와 비교해 보자.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초고를 쓰고, 퇴고를 거듭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충분한 아이디어 스케치 없이 바로 컴퓨터로 작업하는 것은, 구조를 정하지 않고 글을 쓰는 것과 다름없다. 이런 방식은 방향성을 잃기 쉽고, 결과적으로 퀄리티를 낮출 가능성이 크다.
물론 시대가 바뀌었고, 업무 방식도 달라졌다. 과거처럼 모든 디자이너가 연필을 들고 아이디어 스케치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시스템이 편리해졌다고 해서 디자인의 기본 원칙이 사라져서는 안 된다. 빠르게 변하는 환경 속에서도 디자이너라면 아이디어 스케치라는 기본은 지키자. 그래야 더욱 창의적이고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 아날로그 시대 디자이너의 잔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꼭 필요한 말이라 생각하고 글로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