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한 잔 할래?"
이민을 약 3개월 앞둔 어느 날
저녁을 먹고 부른 배가 막 꺼지기 시작할 무렵 괜히 냉장고를 여닫던 엄마가 말문을 열었다.
내가 맥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엄마는 안다. 그럼에도 엄마는 망설이다 괜히 툭 던지듯 물어온다. 그 이유를 모르지 않아 엄마의 짧은 물음이 나를 땅 밑으로 푹 꺼뜨리는 듯 했다.
3개월.
그 시간이 어느 때보다 쏜살같이 흐를 것임을 엄마도 나도 안다.
응, 그래. 하고 무심히 답하는 나를 기다렸다는 듯 엄마는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을 꺼낸다.
맞은 편에 앉아있던 아빠에게 한 캔, 그리고 한 캔은 컵에 따라 내게 한 잔, 당신 앞에 한 잔.
맥주를 앞에 두고 별로 특별할 것은 없다. 그냥 홀짝이면서 독일 맥주는 독하네 어쩌네, 맛도 모르면서. 그러다 시시콜콜한 우리 회사 어느 누가 어쨌더라 하는 이야기들을 늘어놓을 뿐.
요즈음 나는 3개월 후의 내 일상을 자주 그린다.
이민이 까마득한 먼 일일 때는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삶을 만끽할 여유로운 내 모습을 상상했다면 조금 더 현실로 다가온 요즘 내 생각은 공항 보안검색대 앞에서 무언가 걸리기라도 한 듯 멈추어 선다.
상상 속 나는 가방을 메고 엄마에게 손을 흔들고, 발목에 쇳덩어리라도 걸어맨 듯 걸음이 무겁다.
엄마에게 자식이라곤 나 하나밖에 없는데.
갱년기 찾아온 우리 엄마 어느날 문득 우울하고 쓸쓸해지면 누가 커피를 내려주고 누가 케이크 한조각 사다 내밀까.
봄이 오면 엄마의 생일인데, 누가 엄마에게 짠 하고 꽃다발을 안겨주나.
경상도 남자의 표본인 아빠가 할 리는 없으니 매 해마다 그건 내 몫이었는데, 이제 엄마는 자신의 손으로 생일 미역국을 끓일테지. 어쩌면 그마저도 귀찮아 생일을 잊은 체 하며 지나칠지도 몰라.
어느날 갑자기 엄마가 아프면? 그러면 그 옆은 누가 지켜주지?
내가 홀로 여행을 떠났던 어느 겨울, 엄마는 눈이 많이 아팠다고 한다. 온 눈이 시뻘겋게 충혈이 된 채 눈을 뜰 수가 없어서 운전조차 하지 못하고 눈을 움켜쥔 채 병원에 가 눈 안에서 결석을 빼냈다는 사실을 나는 여행이 다 끝나고 집에 와서야 식탁에 엄마가 미처 치우지 못한 안약 통을 보고 알았다. 왜 말하지 않았냐는 말에 엄마는 걱정하게 뭐하러 말하냐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었다.
그러니까 엄마는, 또 그럴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떡하지?
어느 날 문득 퇴근 후 집에 들어와 불 꺼진 집을 맞이하며 갑자기 밀려들 쓸쓸함을 느낄 엄마가, 봄이 오고 벚꽃이 피는데 함께 거닐어줄 딸이 없을 엄마가 나는 날마다 떠올라서 밤마다 사시나무 떨듯 떨어댄다.
그러다 글을 남겨보기로 했다.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엄마를 향한 마음을 담아서.
이민을 준비하는 시간동안, 또 엄마를 떠나있을 모든 시간동안 엄마에게 편지를 쓰듯이 꾹꾹 눌러 담아서.
어쩌면 아빠가 서운해하겠지.
아빠도 여기 있는데 어쩜 엄마만 남겨두고 떠난 사람마냥 그렇게 애틋하고 시리냐고.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엄마와 딸은 그런게 있다.
마주치면 으르렁대며 아웅다웅 하지만 엄마, 하고 부르기만 해도 가슴 한 켠이 몽글몽글하고 마냥 애처로운 그런 애틋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