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았다.’
이방인 뫼르소 -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았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아려오는 말, 엄마가 죽었다. 그런데 엄마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받은 뫼르소는 엄마가 언제 죽었는지 모르겠다한다.】
소설책을 읽다 보면 몇 문장의 강렬한 이미지가 전체 글의 논리를 잠재우며 이해의 중심 줄기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다양한 방향으로 주제를 발산하는 주인공도 강렬한 인상이 배치해 놓은 어느 자리에 주저앉게 된다. 그중 대표적인 소설과 주인공이 카뮈의 이방인과 뫼르소일 것이다.
카뮈의 이방인 첫 문장이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아려오는 말, 엄마가 죽었다. 그런데 엄마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받은 뫼르소는 엄마가 언제 죽었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강한 감정의 반발이 앞선다. 뫼르소는 엄마가 언제 죽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자이다. 글의 논리성은 더욱 미로 속으로 가라앉는다.
【누군가 말했듯이 쉽게 접근되지 않는 책은 해석의 기술이 필요하다.】
누군가 말했듯이 쉽게 접근되지 않는 책은 해석의 기술이 필요하다. 해석의 기술이란 “거의 소가 되다시피 해야 하며 어느 경우에도 현대인”처럼 읽지 않는 기술을 말한다. 소는 거친 여물을 소화시키기 위하여 한번 삼킨 먹이를 다시 되새김한다. 씹고 씹고 다시 씹는다. 그러나 현대인은 단 하루의 시간만이 응결된 짧은 문장을 저작 작용 없이 삼켜버린다.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가보자.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현대적인 방식(뫼르소가 받은 전보 형식)으로 전하는 엄마의 죽음에는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 양로원에서 다시 살아가는 엄마의 삶이 없었다. 그래서 뫼르소는 말한다.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이어서 세상의 소통방식을 비웃는 말이 뒤따른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전보의 내용(‘모친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만으로는 엄마가 언제 죽었는지조차 알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1부 1장을 소처럼 되새김질하며 읽어보자.】
카뮈의 이방인은 1부 6장과 2부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 1장은 엄마의 죽음을 전하는 전보를 받은 뫼르소가 양로원에 도착해 엄마의 장례를 치르는 장면이 주요한 내용이다. 1부 1장에서 우리는 세계는 관습이 사람들의 골수와 피부의 감각까지 장악한 곳임을 읽게 되고,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세계를 맨살로 맞대어 감각하는 자임을 읽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시들어가는 바로 그곳에서 엄마가 다시 삶을 온전히 경험하며 살아가려 했다는 것을 읽을 것이다.
문장을 따라가며 읽어보자.
1) 세계의 움직임은 관습이고, 인간의 감각도 습관이다.
뫼르소는 엄마의 죽음을 전하는 전보를 받고 회사에 휴가를 청한다. 사장은 엄마의 죽음에 대한 조의를 표함도 없이 뫼르소가 회사를 이틀 동안 쉬는 것이 마땅치 않아 하는 눈치이다. 조의 표현은 장례를 치르고 가슴에 상장을 달고 있으면 공인된 격식을 갖추면하려는 모양이다.
“내가 상장을 달고 있는 것을 보면 조문 인사를 할 것이다. 지금은 어쩐지 죽지 않은 것이나 별 다름이 없는 듯한 상태다. 장례식을 치르고 나면 확정적인 사실이 되어 만사가 다 공인된 격식을 갖추게 될 것이다.”
양로원에 도착한다. 원장은 서류를 보고 엄마 이야기를 하며 장례 절차를 알려준다. 시신은 같이 있는 양로원 동료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영안실로 옮겨지고, 엄마의 친구분들은 양로원 관습에 따라 밤샘을 하러 올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흐느껴 울 것이고 죽은 엄마에 대한 친분을 이야기할 것이다. 시간 속에서 동일한 경험의 깊이 동일한 감각으로 세계를 맞이하며 감각마저도 모방되고 재현된다.
“그들은 하도 말이 없어서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여자들은 거의 모두가 앞치마를 두르고 허리를 끈으로 졸라매고 있어서 ----- 남자들은 거의 모두가 몹시 여위었고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 잠시 후 한 여자가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작은 소리를 내며 규칙적으로 우는 것이었다. ---- 모두들 관이라든가 지팡이라든가, 또는 아무것이든, 그러나 오직 그것 한 가지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전등마저도 ----- ”나는 전등 여러 개 중 하나를 끌 수 없겠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벽에 반사되는 불빛 때문에 피로를 느꼈던 것이다. 문지기는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전기 시설이 그렇게 되어 있어서, 다 켜든지 모두 꺼버리든지 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2) 뫼르소는 관습과 길들여진 감성 바깥에서 세계의 속살과 공명하는 자이다.
뫼르소는 날것과 그대로 몸을 비비듯이 세계를 마주치며 감각하는 자이다. 뫼르소의 눈은 인식되어 보이게 만들어진 것을 넘어서 있다. 그의 시야에는 영안실의 “물체 하나하나, 모서리 하나하나, 모든 곡선들이 눈이 아플 정도로 뚜렷이 드러나 보”이고, 영안실에서 날을 새기 위해 들어온 엄마의 동료들을 마치 “지금까지 사람이라고는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바라본다. 뫼르소의 시야에 “그들의 얼굴이나 옷차림의 사소한 모습 하나에 이르기까지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내 앞에는 그림자 하나 없었고, 물체 하나하나, 모서리 하나하나, 모든 곡선들이 눈이 아플 정도로 뚜렷이 드러나 보이고 있었다. 엄마의 양로원 친구들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 나는 지금까지 사람이라고는 본 적이 없는 것처럼 그들을 자세히 보았는데 그들의 얼굴이나 옷차람의 사소한 모습 하나에 이르기까지 나의 눈에 띄지 않은 것이 없었다.”
뫼르소의 감각한다. 온몸으로 세계의 리듬과 동조하며 감각한다. 양로원에 가는 버스 안에서 가솔린 냄새, 길과 하늘에서 반사되는 햇빛, 유리창에 부딪치는 무늬말벌의 붕붕거리는 소리에 몸의 감각은 스며 들어가고, 언덕 넘어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서 소금기 냄새를 맡으며 아름다운 하루의 시작을 맞이한다.
다음은 1부 1장의 마지막 부분이다. 엄마를 보내고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몇몇 장면을 나열하고 있다. 읽어보자.
“묘지 무덤들 위의 붉은 제라늄 꽃들, 페레스의 기절, 엄마의 관 위로 굴러 떨어지던 핏빛 같은 흙, 그 속에 섞이던 나무뿌리의 허연 살, ----- 끊임없이 툴툴거리며 도는 엔진소리, 그리고 마침내 버스가 알의 빛의 둥지 속으로 돌아왔을 때의, 그리하여 이제는 드러누워 열두 시간 동안 실컷 잠잘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때의 나의 기쁨, 그러한 것들이다. ”
3) 모든 것이 시들어가는 곳에서 다시 살아가는 엄마
“이 고장에서 저녁은 서글픈 휴식 시간과도 같았을 것이다. 오늘은, 풍경을 전율케 하면서 천지에 넘쳐나는 햇빛 때문에 이 고장은 비인간적이고도 사람의 기를 꺾어 놓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곳에서 엄마는 다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거기, 뭇 생명들이 꺼져가는 그 양로원” 그곳에서 엄마는 다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원장은 빙그레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야 좀 어린애 같은 감정이지요. 하지만 그와 자당은 떨어져 있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원내에서 놀리느라고 페레스에게 , ‘당신의 약혼 자로구려’하면 그는 웃곤 했어요 ‘ 그렇게 말해주는 것이 그들에겐 좋았던 겁니다. “
“원장은 어머니와 페레스 씨는 저녁이면 흔히 간호사를 데리고서 마을까지 산책을 하곤 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주위의 벌판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하늘 닿는 언덕까지 늘어선 실편백나무 숲의 윤곽이며 적갈색과 초록색의 대지, 드문드문 흩어져 있지만 그린 듯 뚜렷한 집들을 통해 나는 엄마의 심경이 어떠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다시 첫 문단으로, 그리고 ’ 이방인‘ 마지막 문단으로 】
다시 첫 문단으로.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모친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 뫼르소가 받은 전보에는 아무런 뜻이 없다. 뫼르소는 엄마의 삶을 보러 간다. 태양이 아스팔트를 녹이고 갈라 터지게 만드는 곳으로. 엄마를 보내고 뫼르소는 말한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 마지막 문단으로.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왜 한 생애가 다 끝나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다시 시작해 보는 놀음을 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뭇 생명들이 꺼져가는 그 양로원 근처 거기에서도, 저녁은 우수가 깃든 휴식 시간 같았었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 엄마는 거기서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마음이 내켰을 것임에 틀림없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