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아니 에르노
[세월, Les Années]
by Annie Ernaux
”우리는 즉석에서 볼 수 있는 사진과 영화들의 열풍 속에서 계속해서 ‘저장’하기를 원했다. 전국에 있는 친구들의 흩어져 있는 백여 개의 사진이 컴퓨터 폴더에 - 열어 보는 일은 드물다- 새로운 사회적인 용도로 옮겨지고 보존됐다. 중요한 것은 찍었다는 것이었으며, 벚꽃, 스트라스부르의 호텔방, 막 태어난 아기 같은 포착되고 중복된, 우리의 체험에 따라 저장된 존재였다. 장소, 만남, 장면, 물건, 그것은 삶의 완전한 보존이었다. 우리는 디지털로 현실을 고갈시켰다. “
스마트폰을 손에 쥔 우리는 매 순간들을 저장함으로써 시간이라는 차원을 초월해서 살아간다. 사진을 찍고, 영상으로 녹화하고, 화면을 캡처를 하는 과정에서 순간은 영상이나 이미지의 형태로 점점 더 ‘정확’하게 고정된다. 요즘 스마트폰 사진은 GPS 태그부터 조도, 시간, 심지어는 찍힌 인물이 다른 어떤 사진의 인물과 유사하게 생겼는지 분석해 앨범에 분류까지 해준다. 데이터는 원본 그대로 남게 되고, 나는 굳이 그 데이터를 소화할 필요가 없어진다.
순간을 그대로 보존하는 게 가능해지니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프로세싱을 미루고, 사진을 찍는 행위, 기록보다는 기록 행위 자체에 더 집중하게 된다. 시간은 계속해서 그 깊이감을 잃는다. 그렇게 끊임없이 찍어둔 사진들을 다시 열어보는 일이 점점 더 없어질까 두려워진다. 기록만 되고 열람은 되지 않는, 기억이 아닌 그저 비트로만 남는 순간들이 될까봐.
그래서 기술 발전이 가속화될수록 우리가 아날로그에 더욱 매료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손으로 일기를 쓰고, 현상을 맡겨야 하는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알고리즘이 자동 재생해 주는 음악이 아닌 손으로 LP를 뒤집어주면서 음악을 듣는 행위들. 그렇게 우리는 순간들을 소화하고 충실히 느끼기 위해 손을 움직이고, 의식적으로 씹고 뱉어내고 다시 삼키기를 반복한다.
아니 에르노는 자전적 소설인 [세월]에서 사진, 일기, 영상 기록 등으로 남아있는 본인의 기록물을 기반으로 지나간 시간들을 다시금, 그리고 동시에 살아낸다. 그녀는 최대한 많은 되새김질로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들을 중심으로 그녀 개인을 둘러싼 사회에서 일어난 작고 큰 변화들을 되불러낸다. 각 순간들은 사진처럼 각 시점에 고정되어 있으면서도, 시간을 하나의 띠로 형상화해서 이걸 여러 겹으로 접어놓은 것처럼 시공간을 넘어 동시에 재생, 공유되어 마치 10대, 30대, 50대의 그녀들이 겹쳐진 시간대 위에서 동시에 함께 존재하는 인상을 받는다. 이것이 아니 아르노가 그녀의 삶을 소화해 내는 방식이며, [세월]은 한 개인의 장대한 역사에 대한 의식적인 편집, 소화 행위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이 순간들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두 개의 축이 교차하는 형태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매 순간에 그녀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그녀가 보고 들은 것들을 지탱하는 수평선, 또 다른 하나는 몇 개의 이미지가 동반된, 밤을 향해 빠져드는 수평선이다… 그녀는 손에 쥐어야 할 다수의 물건, 그녀를 오늘날까지 이끌어 온 수천 번의 나날들이 쌓인 이 기억들을 정리할 수 있을까.”
그녀의 기록에서 우리는 시간을 초월한 우리의, 모든 여성의, 모든 사람의 삶을 본다. 우리 모두는 그녀처럼, 기대와 두려움이 섞여있는 유년기와 청년기를 지나 서서히 자신이 되기를 거부했던 기성세대로 편입되고, 어느새 미래가 아닌 과거를 선망하는 삶을 살게 된다. 어려서는 뚜렷하지 않은 미래를 보며 꿈을 꾸고, 커서는 어느 정도 규격화된 현실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자유롭게 꿈꾸던 시절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늘 그렇게 갈망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인가 보다.
젊어서 자유롭고자, 해방되고자 하던 것은 나이가 들며 자유에 대한 또 다른 강박과 속박으로 진화한다. 아니 에르노는 어린 시절 피임과 성에 관련해 사회와 교회의 압박과 구속을 받지만, 성과 쾌락에서의 “해방”을 얻고 나서 해방감은 잠시뿐, 꼭 쾌락을 추구해야 한다는 새로운 구속을 얻는다. 쾌락조차도 꼭 행해야 하는 것, 꼭 즐겨야 하는 것으로 인지하게 되는 이 과정은 결국 우리의 모든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한 세대가 극복해 낸 장애물은 그 세대에게 다음 새로운 과제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전후에 비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을 때, 가난으로부터는 해방되었지만 티브이 광고나 편리함에 의해 없어도 충분했던 것들로 삶을 가득 채워야 하는 필요를 느끼는 것 처럼. 자유로워진 임신과 낙태가 쾌락 추구에 대한 압력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그녀가 기록한 삶은 가장 솔직하고 자전적이면서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이든 공감할 수 있는 삶의 흐름이 되어,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넘치는 물건들은 생각의 결핍과 믿음의 소모를 감췄다.”
나는 이 책이 우리에게 어떤 뚜렷한 답을 주는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니 에르노는 ‘나는 이렇게 살아왔고, 살아온 시간을 이렇게 되살아간다’ 라고 이야기할 뿐, 그 어떤 삶에 대한 방향성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확실한 것은 우리는 아니 에르노처럼 개인의 수많은 순간들을 곱씹고, 뜯고, 게워내고, 삼키고, 되새기며 살아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결국 지워질 것이기 때문에, 사진도, 영상도, 일기도, 기록도, 그리고 마침내 기억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순간들을 지속적으로 살아내야 한다는 것. 에너지를 써서라도 그 순간들을 살아내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에서 그 어떤 것도 보존되지 않고 결국은 허무하게 사라진다. 그렇다면 꾸준히 불러내고 살아내는 수 밖에. [세월] 본문에서 가장 강렬했던 구절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 모든 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워질 것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쌓인 사전은 삭제될 것이다. 침묵이 흐를 것이고 어떤 단어로도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며, 입을 열어도 ‘나는’도, ‘나’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언어는 계속해서 세상에 단어를 내놓을 것이다. 축제의 테이블을 둘러싼 대화 속에서 우리는 그저 단 하나의 이름에 불과하여, 먼 세대의 이름 없는 다수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점점 얼굴을 잃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