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그룹장님 비서로부터 메일을 받았습니다. 그룹장님 비서에게 메일이 오면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그룹장님과 점심식사를 함께 해야 하는 순번이라는 것. 메일 제목을 보자마자 생각했습니다.
'아, 이제 차례가 왔구나.'
참석자는 팀장님 제외 우리 팀 팀원들 모두였습니다. 팀장님을 제외하는 이유는 팀원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듣기 위함입니다. 표제는 그룹장님과의 중식이고 부제는 조직문화 간담회라고나 할까요. 좋은 취지입니다. 다만 편한 자리는 아니지요.
그리고 그룹장님과의 식사 자리가 꾸준히 있는 데에는 조금 더 내밀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그룹장님의 나 홀로 식사를 방지하기 위함이지요. 각 팀마다 돌아가며 그룹장님과의 점심식사를 당번처럼 행하는 구조랄까요.
이 내밀하지만 강력한 이유는 마치 볼드모트와도 같습니다. 모두들 간담회라는 명목에 가려 있는 '밥 먹어 드리기'라는 진짜 취지를 압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 대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지요.
그렇게 대망의 당일이 왔습니다. 저희 팀원들은 그룹장님과 함께 사옥 근처 쌀국수집으로 갔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흐르는 어색한 침묵. 우리 팀원들 모두 조용한 내향형 인간인지라, 다들 진땀 빼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습니다. 심지어 쌀국수집도 그날따라 조용해서 침묵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숫기 없는 팀원들이 조용히 있자 그룹장님께서 먼저 말을 꺼내셨습니다. 그날이 금요일이었기에 화제는 자연스레 주말에 대한 이야기로 흘렀습니다.
"상민님은 주말에 뭐 할 계획인가?"
그렇게 한 명씩 그룹장님께 주말 계획에 대해 말씀드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침묵이 다시 올 무렵, 시킨 메뉴가 나왔습니다. 쌀국수가 그토록 반가울 줄이야.
식사가 끝난 후, 가까운 카페로 이동했습니다. 커피가 나오기 전, 그룹장님이 잠시 담배를 피우러 가셨습니다. 불편한 와중에 잠시나마 편한 시간입니다. 팀원들과 서로 말 좀 많이 하라며 부추깁니다. 숫기 없는 팀이라 죄송할 따름입니다. 마침 그룹장님께서 들어오십니다. 조금이나마 시끌벅적해졌던 팀원들이 다시금 음소거 상태가 됩니다.
커피를 먹으며 회사 일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룹장님은 작년의 그룹장님이 체결해 놓은 대형 계약건을 해결하느라 골치가 아프신 모양입니다. 회사 다니면서 종종 전임자가 싸질러 놓은 똥 때문에 고생할 때가 있는데, 그룹장님도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어쩌면 전임자의 똥을 지우는 것은 직장생활의 숙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사팀으로부터 발령받은 자리에서 오늘 할 일을 하는 것. 그것이 마음에 들건 마음에 들지 않건, 해결하기 난처한 일이건 쉬운 일이건, 그 자리에 있으니 그 자리에서 처리해야 할 일을 해야 하는 것. 결국 임원이건, 저 같은 일개 팀원이건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룹장님의 조언이 이어졌습니다. 회사 내에서 데이터 관련 분야는 유망할 예정이고, 계속 인원이 필요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데이터 분석에 대한 역량을 키우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팀장님께 일주일에 두 시간이라도 학습시간을 쓸 수 있도록 팀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본인 역량 개발에 반드시 힘쓰라는 좋은 조언이었습니다.
그룹장님의 말씀을 들으며 팀원들끼리 눈이 마주쳤는데, 매일 같이 보고지옥에 시달리는 동지로서 애잔한 눈빛이었습니다. 다들 마음속으로 아마 같은 생각을 했을 겁니다.
'학습시간 몰라서 못쓰는 거 아니고, 너무 바빠서 못쓰는 겁니다.'
그리곤 또다시 침묵의 파도가 밀려왔습니다. 숫기 없는 팀원들이 빨대로 커피의 얼음만 뒤적이며 쭈뼛거리자 그룹장님께서 쓴웃음을 지으시며 서둘러 자리를 마무리하였습니다.
"이제 그만 들어가지~"
그룹장님의 쓴웃음을 보며, 회사에서 그 누구보다 외로운 자리가 임원의 자리구나 싶었습니다. 그룹장님이라고 간담회를 명목으로 직원들이 밥 먹어 드리는 것을 모를 리 없습니다. 저는 그룹장님이 리더십이나 인품이나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가 그룹의 리더로 있기 때문에 편하지만은 않습니다. 회사에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그룹장님을 동네 이웃으로 만났다면? 훨씬 가깝고 편하게 대할 수 있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