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하양 Mar 24. 2021

그곳에서 나는 아홉 살만이 할 수 있는 질문을 했다

서른여덟의 남자와 서른둘 여자, 더 아픈 건 누구였을까




방문 너머 큰 소리가 나면
나는 어둠 속에서 마음을 졸였다.
 또다, 또다시 잠들 수 없는 새벽이 되겠구나.




그럴 때면, 언니와 나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렇게 고함소리와 울음소리와 날카로운 파열음이 멎을 때까지, 연약한 문짝 너머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런데 그날은 울음소리가 너무 아파서 평소처럼 이불을 뒤집어쓸 수가 없었다. 누군가 정말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이전에도 이런 울음을 들은 적이 있다. 학교 사물함보다도 작은 칸 안에 사는, 나는 얼굴도 본 적 없는 이의 사진을 매만지며, 여자는 그 앞에 주저앉아 엄마, 엄마, 어디 갔어, 하고 통곡했다. 20년이 지났지만 나는 그 서러운 흐느낌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캄캄한 어둠이 어린 몸을 짓눌렀다. 숨을 쉬고 있는데도 가슴이 답답해서 창문을 열었다. 축축한 새벽 공기가 흘러 들어오고, 장독대와 여자의 텃밭, 꼬맹이 둘을 위해 남자가 만들어 준 그네가 보인다. 그 뒤로 줄지어 피어있는 해바라기는 기운이 없었다. 달빛 아래 처연한 해바라기들이 기도를 드린다. 어서, 아침이 되게 해 달라고.




나는 겨우 일어서 문 앞에 섰다. 오래돼 결이 갈라진 문짝, 그 틈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손 끝에 닿은 문짝이 따가웠다. 꽤 오래전부터 내게 문짝은 이런 것이었기 때문에, 다현이네 집에 갔던 날 부드럽게 다듬어진 방문을 보고 나는 속으로 크게 놀라고 말았다. 가시가 박히거나 여린 살을 긁어버리는 문짝은 문짝이 되어선 안 되는 거라는 걸, 처음 알았다.






   -끼이익.


문짝이, 삐걱이는 나무판이 거칠게 아우성을 친다. 너도 부드럽고 매끄럽던 때가 있었겠지. 이렇게 변해버린 건, 맞닿았던 숱한 시간과 눅눅한 현실 때문일까.


문을 열자 보이는 건, 남자의 검은 뒤통수.

남자의 키는 작았지만 여자는 그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하아.


소름 돋게 무서웠다. 남자의 한숨 소리를 들으면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이대로 침대로 돌아가 이불을 뒤집어쓴다면, 나는 사라진 엄마의 사진 앞에서 애통하게 그 이름을 부르게 될 것만 같았다.





   -뭐해, 아빠?


게슴츠레 뜬 눈을 비비면서 한껏 뭉개지는 발음으로 그렇게 말했다. 내 어설픈 연기에 속을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는 남자의 시선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 들어가.

   -나 목말라.


남자의 등 뒤에 가까이 다가섰을 때쯤 남자는 그렇게 명령했다. 하지만 아직 여자를 확인하지 못했다. 남자를 지나쳐 거실과 일자로 이어진 주방을 바라보았다. 까맣고 더럽고 차가운 주방. 내가 가장 싫어하는 곳이었다. 까맣고 더럽고 차가운 곳, 가장 깊숙한 그곳에, 여자가 앉아 있었다.


아홉 살 인생에 있어 가장 긴 시간이었다. 고작 스무 평인 집, 거실 끝에 서 있는 남자에게서 여자에게로 향하는 걸음걸음마다 바닥에서 가시가 솟구쳐 오르는 듯 발바닥이 아렸다.






거실의 불빛도 닿지 않는 주방 안쪽. 여자는 한 손으로 쉴 새 없이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왜 하필 그 앞일까, 나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싱크대 하단 선반 앞.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야간 근무 후 피곤에 찌든 여자의 짜증과 신세한탄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쿡쿡 찔렸던 아홉 살은 까맣고 더럽고 차가운 주방으로 가 설거지를 했다. 래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여자가 주저앉아 있는 그곳 안에는 그 날 저녁, 볶음밥을 해 먹고 씻어놓은 주방칼이 들어 있었다는 .


여자는 계속해서 커다랗고 두꺼운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다른 손으로는 역시나 검은 손잡이를 움켜쥔 채로.




처음 보는 광경은 아니었다.

여자와 남자가 싸우고, 물건이 깨지고,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으면, 여자는 이내 그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칼을 꺼내 들고 자신의 목을 향해 날을 들이밀었다. 죽어버릴 거야. 여자가 그리 소리칠 때에도 남자는 말리지 않았다. 그만해. 윽박지르는 게 전부였고 거실 끝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여자의 손끝이 덜덜 떨리자 칼끝이 몇 번이나 여자의 목에 닿았다 떨어졌다. 괴물 같은 울음소리와 달리 여자는 늘 그 앞에서 망설였고, 그를 알기에 남자는 손을 뻗는 것조차 하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마음이 아팠던 걸까.
울고 있던 여자와 잔뜩 화가 난 남자 중
더 아픈 건 누구였을까.

아홉 살 답지 않은 고민을 하며 나는 아홉 살만이 할 수 있는 질문을 했다.



    -엄마, 거기서 뭐해?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 아니, 아무것도 보지 못했단 사실 자체도 보지 못했으니 괜찮아. 갸웃거리며 슬쩍 웃자 벌건 눈을 한 여자가 코를 훌쩍이며 답했다.






   -... 커피가 먹고 싶어서.


그녀는 웃으려 했던 것 같다. 아마도 나를 따라서 웃어보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생각대로 되지 않았던 건지, 허벅지 밑으로 빼꼼 드러난 검은 손잡이를 쥔 손이 다시금 덜덜 떨려왔다. 못 본 척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커피포트의 전원을 켰다. 차가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물이 끓기를 기다렸고, 여자와 같은 자세로 있는 나를 보고 남자는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너 뭐해, 빨리 들어가.


단단한 쇠공이 눈 앞으로 날아드는 느낌. 심장이 아플 정도로 탄탄하게 경직되는 느낌. 화난 남자의 목소리는 늘 그랬다. 여자도, 그랬을까.





   -엄마가 커피 먹고 싶다잖아.


일회용 종이컵에 두 개의 믹스커피를 나눠 담았다. 물을 붓고 티스푼으로 골고루 저었다. 여자 앞에 다가가 컵을 건네자 뜨끈한 커피를 받아 들며 여자가 설핏 웃었다.





   -고마워.


빨간 딸기코. 울음이 가득 찬 코맹맹이 소리였지만 여자의 미소에 마음속 팽팽한 끈이 스르르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제야 여자를 등지고 거실로 나설 수 있었다. 남자는 나를 쏘아보았고 나는 또다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빠 것도 있어.


남자는 내 손에 든 커피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는 그를 지나쳐 낮고 기다란 탁자에 종이컵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커피가 요동치며 휘몰아치다 이내 균형을 잡고 출렁댔다. 넘치는 일은 없었다.




나는 방에 들어가 삐걱이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새어오는 소리가 없도록, 더 이상 새어 들어오는 빛이 없도록 문을 세게 잡아당겼다. 그러나 이내 곧, 누군가의 울음소리와 누군가의 고함소리는 또다시 문짝을 넘어 들어왔다. 문을 꼭꼭 닫아도, 오래전 떨어져 나간 결의 틈을 메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