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세상에 나온 젖먹이를 품에 안은 채 내 친구가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유난히 옅은 갈색 동공과 머리칼. 5년 전 만난 몽골 아가씨와 변한 것이 없는 듯하지만, 이젠 어느덧 두 아이의 엄마가 된 그녀였다.
-내가 용서하고 말고가 어디 있겠어. 그냥 이해해.
품 안의 고 작은 녀석에 대해 떠들고 있었는데, 어느새 또 서로의 엄마 이야기까지 나와버렸다. 식탁에 걸쳐 서서 가만히 두 사람을 들여다본다. 손바닥 하나로 다 가려질 만큼 작은 아기의 등을 그녀는 아주 조심스럽고 다정하게 토닥이고 있었다. 그 뭉근한 애정의 손길이 나를 멍하게 했다. 나는 그녀의 오른 손목 위 베이지색 보호대를 가리키며 말을 돌렸다.
-그거, 옛날에 쓰던 거네?
응. 서랍에서 찾았어.
5년 전, 스물다섯이었던 그녀가 첫째를 낳고 쓰던 낡은 보호대. 다시 한번 내 시선 안에 그녀의 모습을 담는다. 언제라도 젖을 물릴 수 있도록 목이 깊게 파인 헐렁한 티를 입고, 까실한 입술을 한 채, 엉덩이엔 도넛 모양의 방석을 깔고 앉아 있었다. 퉁퉁 부은 손가락, 발가락이 출산 후 약에 취해 뒤척이던 병실의 그녀의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눈은 품 안의 아이를 내려다보며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어쩐지 서글퍼져서 괜히 시간을 확인했다. 다행히 어린이집 하원 시간 언저리였다.
평소보다 일찍 친구의 집을 나섰다. 고작 몇 백 미터 떨어진 어린이집으로 향하는 길, 나는 잠시 놀이터 벤치에 앉아 있었다. 서러운 마음은 금세 가라앉을 것이다. 밖은 추웠고, 나는 고작 코트 밖에 걸치지 않았고, 아주 늦어도 30분 안에는 아이를 데리러 가야 했으니까.
크게 숨을 내쉬니 얼어붙을 것 같은 공기가 콧속, 저 안쪽 가슴 근육까지도 닿는 것 같았다. 그 숨이 뜨겁고 묵직한 것들을 함께 빼내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린이집 벨을 눌렀다. 힐롱이가 선생님 손을 잡고 나오더니 "엘리!"하고 나를 부르며 웃었다. "오늘도 엘리가 대신 왔어." 하면 "선생님, 엘리예요. 앙힐롱 이모."하고 또 나를 선생님께 소개해준다.
어느새 의젓해진 아이가 장에서 자신의 신발을 꺼내어 신고 한쪽 어깨에 흘러내린 가방까지 야무지게 고쳐 멘 뒤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허리를 굽혔다 편다. 그리곤 그 작은 게, 자연스럽게 제 어깨 위로 한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아온다.
힐롱이는 내 옆에서 하루 일과를 읊어댔다. 어린이집 골목을 빠져나와 아이와 자리를 바꿔 인도 쪽으로 걷게 하면서 "허어? 그랬어?", "진짜 좋았겠다", "집에 가서 자랑해야겠다~" 적절히 맞장구를 쳤다. 내 반응에 더 신이 난 아이는 또 이야기 한 보따리를 풀어낸다.
하얀 입김과 함께 퍼져나가는 아이의 들뜬 목소리. 수다스러운 그 입매 끝을 따라가면, 아주 먼 기억 속 엄마 옆에서 끝없이 재잘거리던 내가 서있다. 이렇게 자연스럽던 순간이 있었겠지. 이렇게 짧은 순간순간마다 가득했을 당연함이, 따뜻한 기억이, 언젠가부터 남아있지 않았다. 아이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한껏 높아진 목소리로 대답하며 나는 마음속 한 귀퉁이에 앉아 울었다.
부모님이 타인의 관계로 돌아간 건 내가 대학에 입학한 후였다. 이미 오래전부터 합의된 일이었지만,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내게 조금이라도 불이익이 있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두 사람은 두 사람의 결정에 기다림을 두기로 했다. 어린 자식을 위한 두 사람의 마음 덕에 나는 책 잡힐 것 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두 사람의 마음 때문에 나는 그들을 속 편히, 솔직하게 원망할 기회도 흘려보내야 했다.
자주 가던 초밥집 식탁에 마주 앉은, 오랜만에 보는 엄마 앞에서 어쩐지 온 마음을 다해 웃을 수 없었지만 엄마는 괴로웠을 테니까, 줄곧 미안해하고 있으니까, 하며 얼굴 근육에 더욱 힘을 주었다.
어릴 적 기억 속 조금 고집스럽고 무서웠던 남자는 법원에 다녀온 후로 남겨진 딸들의 눈치를 보며 한없이 작아지곤 했다. 그리고 너희에게 미안할 뿐이야, 라고만 반복했다.
한참 전부터 서로 다른 쪽으로 향하려는 배를 오랜 시간 동안 [나]라는 줄로 겨우 붙들고 있었다는 부채감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미안해할 일 아니야, 하고 답했다. 어딘가 울컥울컥 쏟아질 듯하면서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균열을 넘어 완전히 깨져버린 가족, 그로 인해 적응해야 했던 크고 사소한 변화, 더 이상 당연하고 단조롭지 못한 ‘부’와 ‘모’를 향한 복잡한 감정.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한 채 성인으로 규정된 나이를 지난 나는 여전히 그 시절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게 스물일곱이 되어서도 나는 여전히 어떤 순간순간마다 힘없이 스러졌다.
일상을 소화하다가 문득,
손을 잡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엄마와 아이를 볼 때, 퇴근길 역에서 비슷한 키에 똑 닮은 단발을 하고 나란히 걷는 중년 여성과 교복차림의 소녀를 뒤따라 걸을 때, 안아달라 치근덕대는 아들이 귀찮다며 고개를 젓는 부장님 입가의 옅은 미소를 볼 때, 엄마의 비밀 레시피를 소개하는 TV 속 여자의 말투에 들어찬 어떤 자랑스러움을 발견할 때마다,
뚜렷하게 형용할 수 없는 상실감이 손쓸 틈 없이 밀려들어서 다시금 마음속 귀퉁이에 쪼그려 앉아 우는 일이 잦았다.
한 번쯤, 두 사람을, 이제는 연락도 닿지 않는 엄마를, 마음껏 원망해볼 걸 그랬다.
나는 두 사람을 이해하지만 많이 슬프다고. 당장 엄마 없이 아빠와의 생활이 그려지지 않는다고. 모두가 불행하지 않길 바라지만 아직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엄마의 상처에 속이 상하면서도 당장 자식 둘을 뒷바라지하는 아빠가 마음 아파서, 하루에도 수없이 누구를 미워했다 가여워했다 그렇게 복잡한 마음으로 나는 마음 편히 웃을 수가 없었다고.
이제는 영영 비어버린 엄마의 자리가 사무치게 그리워서 우는 날이 많았다고, 그렇게 사실은 아주 많이 미웠다고 마음껏 원망해볼 걸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