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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철 Nov 03. 2024

좋거나 나쁘거나, 내 인생

공원에서 검정 선글라스를 낀 어르신과 인생사를 나누었다.

요즘 삼국지를 다시 읽고 있다. 소설가 황석영이 번역한 버전이다. 내가 처음 삼국지를 읽은 것은 중학생 때였다. 그때는 너무 어려서 삼국지에 담긴 의미와 재미를 제대로 느낄수 없었다. 유비, 관우, 장비, 조조, 여포, 조자룡 등 그동안 편린으로만 기억되는 후한말 영웅호걸들의 장쾌한 서사가 새로운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을 갈까 하다가 집에서 조금 먼 공원으로 나왔다.



마침내 조조가 군사를 일으키는 부분을 읽고 있는데 공원을 거닐던 한 어르신이 내게 다가오더니....


"젊은이 이 자전거는 전기로 가는 건가요?" 라며 관심을 보이신다. 

"네, 전기 자전거예요."


어르신은 평소 전기자전거에 관심이 많으셨는지 이것저것 물으셨다. 나는 읽던 책을 덮고 자세히 설명을 드렸다. 자전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살아온 인생사도 풀어놓으셨다.


"내가 소싯적에 양계장을 하다가 망했어요. 병아리를 부화시켜서 파는 거였는데 1000수 정도 했어. 상당히 큰 규모였지. 근데 계속 값이 떨어지는 거야. 그리고서 사북에서 탄광 일을 했어. 한 오 년쯤 했나. 허리를 다쳐서 보상금을 삼백만 원을 받았어... 72년이니까 꽤 큰돈이었지. 퇴직금 30만 원을 보태서 4층짜리 건물을 샀지.... 얼마 전까진 경비도 했지."


검은 선글라스를 낀 어르신은 처음 만난 내게 자신의 인생사를 넋두리 하듯 말하셨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가 한 십억 조금 넘나. 한참 때는 13억까지 했지. 근데 난 원래 살던 4층짜리 건물이 더 좋았어. 월세 따박따박 받고 좋았는데 재개발되는 바람에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한 채랑 보상금 조금 받았지, 안성에 한 400평 되는 텃밭도 있고."

"자식이 셋 있는데 막내 놈이 좀 속을 썩여. 아 글쎄 얼마 전엔 지놈에게 물려줄 유산이 작다고 나한테 손찌검을 하지 뭐야." 

"아휴, 속상하셨겠어요."

"그럼, 엄청 속상했지. 이놈의 자식 한번만 더 그러면 내가 재산 안물려준다고 했어."



그렇게 시작된 어르신과의 예기치 않았던 대화가 두 시간이 넘도록 이어졌다. 연세가 예순 후반쯤 된 듯했는데 여든 하나라고 하셔서 놀랬다. 한 십 년은 더 젊어 보인다고 하니 껄껄 거리며 좋아하셨다. 


"오래간만에 젊은 친구랑 이야기를 나누니 기분이 좋구먼." 




하늘을 보니 비행기 한대가 날아간다. 어르신과의 대화는 삼십 분 정도 더 이어졌다. 다시 읽은 삼국지도 흥미로웠지만 공원에서 생면부지의 어르신과의 대화가 생경하면서도 더 흥미로웠다. 나도 어르신에게 좋거나 나쁘거나 내 인생 이야기를 했다. 어르신은 흡족한 듯 이제 그만 걷기 운동을 해야겠다며 자리를 뜨셨다. 나도 집으로 가기 위해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았다. 꼭 허기가 져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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