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누아르 <산책>
요즘 엄마는 감사일기를 쓴다.
그리고 그 일기엔, 가끔 내 이름이 있었다.
“오늘은 네가 어디서든 잘 살고 있어서 감사했어.”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요즘처럼 하루가 늘 쫓기고 마음이 거칠어질 때면 그런 문장이 오래 남는다. 회사에서 예민해진 마음으로 커피를 쏟은 날, 퇴근길 신호에 걸려 괜히 한숨이 나왔던 날, 그 문장이 천천히 되살아났다. ‘그래도 잘 살고 있어서 감사해.’ 그 단순한 말이 이상하게 마음을 붙잡았다.
며칠 전, 엄마는 또 다른 구절을 읽어주었다.
“온화함과 배려는 나약함이 아니라,
내면의 강함이다.”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지만, 전화를 끊고 나서 한참을 생각했다. 엄마의 세상은 언제나 따뜻했는데, 내 세상은 여전히 삐걱거렸다. 조금만 힘들어도 불평했고, 상처를 받으면 세상을 탓했다. 그런데 엄마는 그 안에서도 감사를 찾아냈다. 그건 단순한 낙관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힘이었다.
그런 따뜻한 시선을, 나는 그림에서도 본 적이 있다.
게티센터에서 만난 르누아르의 <산책(La Promenade)>라는 작품이었다.
숲길을 걷는 한 쌍의 남녀, 그들 사이를 스치는 부드러운 빛, 고요한 공기. 특별한 사건은 없는데 괜히 따라 걷고 싶어지는 장면이었다. 자연과 사람 사이의 교감, 그 순간을 감싸는 햇살.
르누아르의 시선 속엔 그런 부드러움이 있었다. 그는 인상주의 화가 중에서도 유난히 사람을 따뜻하게 그렸다.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웃고 있고, 평온하며, 사랑스럽다. 그는 말했다.
"세상에는 이미 괴로움이 충분합니다.
그림에서는 기쁨을 그리고 싶어요."
그의 말처럼 <산책> 속의 빛은 따뜻했고 색은 포근했다. 르누아르는 색을 미리 섞지 않고 캔버스 위에 그대로 얹은 뒤, 빛과 그림자만 덧입혀 자연스럽게 완성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진짜 햇살이 스며드는 듯한 온기가 있다. 그저 한 쌍의 산책이 아니라, 사랑과 희망, 평범한 일상의 찬란함이 머무는 장면처럼 느껴졌다.
그런 그에게도, 고통은 예외가 아니었다.
르누아르는 52세에 류머티즘 관절염을 앓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굳어 붓을 쥘 수 없게 되자, 붓을 손에 묶고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오른손이 안 되면 왼손으로. 그는 멈추지 않았다.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는다."
그의 말처럼, 그림 속 미소는 단순한 낙관이 아니었다. 수많은 고통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힘'을 잃지 않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78세의 르누아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야 뭔가를 배우기 시작한 것 같다."
그 말이 오래 남았다. 끊임없이 배우려는 겸손함, 그리고 고통 속에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진짜 강함이 아닐까.
그림 앞에 서 있자, 엄마가 떠올랐다. 불평과 피로 속에서도 감사를 적어내려가던 사람. 엄마처럼 르누아르도, 세상의 따뜻함을 놓치지 않으려 애쓴 사람이었을 것이다.
며칠 전 택시를 탔을 때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기사님은 퇴근길 정체 속에서도 조급해하지 않았다.
내가 “오늘 너무 피곤하네요”라고 말하자, 그는 백미러 너머로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잘 버티고 있잖아요. 세상은 생각보다 괜찮아요.” 그는 어린 시절 병을 앓고 부모님을 일찍 잃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덧붙였다. “힘들어도 사람은 결국 일어나요.” 그 말이, 엄마의 목소리처럼 오래 남았다.
나는 여전히 쉽게 짜증내고, 마음의 여유를 잃을 때가 많다. 하지만 요즘은 조금씩 알 것 같다. 직업보다도, 말보다도, 결국 남는 건 ‘사람의 됨됨이’라는 걸. 엄마, 르누아르, 그리고 그 기사님.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의 따뜻함을 보여줬다. 나도 언젠가,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서 조용히 온기를 남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랑처럼 스쳐가도, 그 따뜻함만은 오래 남는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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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쓰고 나니까 계속 쓰고 싶네요! 게티센터의 작품들에 대해 도슨트 준비하며 정리해놓은 내용들을 어떻게 재밌게 풀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재밌고 공감가는 이야기로 예술에 대해 공유하고 싶어요!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입니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