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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은 권태가 아니라 발견이었다

폴 세잔 <사과를 가진 정물화>

by Summer
일상 속 새로움

일상에서 반복되는 일에도 새로움을 느낄 때가 있다. 내게는 달리기가 그랬다. 가끔은 권태가 찾아왔다. ‘이걸 왜 계속하지?’ 스스로에게 물을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멈출 수가 없었다. 5년 전 시작한 러닝은 어느새 매주 세 번, 네 번씩 내 삶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매번 뛸 때마다 이전과는 다른 무언가를 발견한다.


공기의 온도, 바람의 방향, 신발의 쿠션감, 내 몸의 컨디션까지 모든 요소가 그날의 나를 새롭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늘 실험한다. 낯선 장소를 찾아 뛰어보고, 새로운 러닝화를 신어보고, 때로는 속도를 늦추어 천천히 달려본다. 달리기는 단순히 체력을 키우는 시간이 아니라, 나를 관찰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렇게 달리기는 어느새 내게 목표를 세우고 나아가는 힘을 주었다. 지치고 고단한 순간에도 함께 뛰며 “할 수 있다”는 말을 나누는 동료들이 있었다. 그들 덕분에 나는 ‘함께’라는 가치의 따뜻함을 배웠다. 마라톤에서는 눈물과 웃음, 슬픔과 기쁨을 오가며 삶의 희로애락을 압축적으로 경험했다.


그렇게 꾸준히 달리다 보니 나는 나를 조금씩 더 알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달리기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사과 하나로 세상을 바꾼 사람, 폴 세잔


좋아하는 행위에 몰입하던 나처럼, 사물 하나에 평생을 바쳐 실험을 이어간 사람이 있다. 바로 폴 세잔이다. 세잔은 ‘사과’를 사랑했다. 게티센터에서도 그의 사과 그림을 만날 수 있다.

사과 몇 알, 화병, 그리고 테이블. 언뜻 보면 평범한 주방 풍경 같지만 자세히 보면 어딘가 이상하다. 테이블은 기울어져 있고, 사과는 당장이라도 굴러떨어질 듯하지만 묘하게 멈춰 있다. 시점도 일정하지 않아 마치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본 듯한 느낌을 준다. 그것이 바로 세잔의 실험이었다.


그는 똑같은 사과와 화병을 수백 번 넘게 그리며 색채, 질감, 원근법, 그리고 관찰자의 시점까지 끝없이 탐구했다. 멈춰 있는 정물에 생명과 에너지를 불어넣은 것이다.


세잔은 말했다.


“나는 인상주의로 눈을 열었지만, 이제 그 너머에서 형태의 본질을 찾고 싶다.”

그의 실험 덕분에 세잔은 훗날 입체파의 아버지, 즉 20세기 현대미술의 문을 연 인물로 기억된다. 말하자면 그는 사과 하나로 세상을 바꾼 셈이다.



세잔은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의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법학을 원했지만, 그의 마음은 언제나 그림에 있었다. 낮에는 법학, 밤에는 미술. 결국 친구 에밀 졸라의 격려로 파리로 떠나 그림을 공부했다. 루브르에서 명화를 베끼며 실력을 쌓았고, 피사로, 모네, 르누아르 같은 화가들과 교류하며 화풍을 다듬었다. 그러나 미술학교에서는 계속 낙방했다.


젊은 시절의 세잔은 감정이 폭발하는 그림을 그렸다. 캔버스 위에는 검은색과 갈색이 지배했고, 그의 불안과 분노가 그대로 묻어 있었다. 그러다 친구 졸라가 발표한 소설 속 ‘비극적인 화가’가 자신이라는 걸 깨닫고 상처를 입은 세잔은 세상과 멀어졌다. 그의 삶에는 점점 그림만이 남았다.


그를 바꾼 건 카미유 피사로였다. 피사로는 세잔에게 말했다. “빛을 봐라. 색으로 생각하라.” 그 말을 들은 세잔은 비로소 자연의 빛과 색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형태와 색을 실험하기에 완벽한 대상, 사과에 집중했다.


그는 말했다.


“나는 사과 하나로 파리를 놀라게 하고 싶다.”

움직이지 않는 사과는 그의 완벽한 모델이었다. 그는 250점이 넘는 정물화를 남겼고 대부분이 사과였다. 세잔에게 사과 껍질 너머에는 색과 형태의 본질이 있었다. 사람의 눈이 두 개인 것처럼 그는 사물을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해 하나의 화면에 담으려 했다. 이 다중 시점의 실험은 훗날 입체파로 이어졌고, 피카소는 세잔을 두고 “우리 모두의 아버지”라 말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세잔의 색은 점점 밝아졌다. 처음의 어두운 갈색 대신 빨강, 노랑, 파랑이 등장했다. 그는 특히 파란색을 “다른 색에 진동을 주는 색”이라며 사랑했다. 그의 색은 감정이자 언어였고, 이 감정의 실험은 야수주의로 이어져 마티스 같은 새로운 세대에게 영감을 주었다. 세잔은 그렇게 한 평생, 사과 속에서 세상의 구조를 탐구했다.


세잔은 정물화를 실험실처럼 사용했다. 그 안에서 형태의 본질을 탐구했고, 다중 시점을 통해 미술의 패러다임을 바꿨으며, 색채를 통해 인간 감정의 진동을 표현했다. 게티센터의 <사과를 가진 정물화> 앞에 서면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움직임과 감정, 그리고 본질이 느껴진다.


그 그림 앞에서 나는 생각했다. 남들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해도 내가 푹 빠져 다양한 실험을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내 안의 고유한 색채가 드러나지 않을까. 사랑하는 것을 더 사랑하고, 그 안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며, 그 진심이 쌓이면 언젠가 누군가도 그 마음을 알아보지 않을까. 내가 세잔의 그림을 보고 그의 사과 사랑을 느끼듯이 말이다.


달리기와 사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 같지만, 둘 다 결국 같은 것을 반복하며 새로움을 발견하는 일이다. 나는 달리는 길 위에서도 세잔의 사과를 떠올릴 때가 있다. 그의 붓끝이 사과의 곡선을 따라가듯, 나의 발걸음도 길 위의 리듬을 따라간다.


그때 깨닫는다. 새로움은 멀리 있지 않다는 걸. 어제와 같은 일을 하면서도 오늘의 나로 바라볼 때, 그 속에서 새로움이 피어난다는 걸.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달린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세잔의 사과처럼 나만의 색을 찾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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