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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에 Feb 07. 2022

천성을 무시할 수 없는 인간


Hermann Hesse, <Tessiner Landschaft>, Watercolour on paper, Ludorff Gallery, Düsseldorf




타고난 도화지의 색깔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우리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 정열의 붉은 색이면 뜨거운 관계를 지향하며 사람과 살을 맞대고 살아가고, 차분한 하늘색이라면 내 주변에 큰 동그라미를 치고 그 누구도 들어오지 않는 시간을 유지한 채 살아간다.


모호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요즘말로 색깔이 없다는 말은 무미건조하다는 뜻이 될 수 있지만, 난 모호한 색을 가진 사람들이야 말로 하나의 축복을 갖고 태어난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상념에 요즘 자주 빠져들곤 한다.


나의 글을 쭉 읽어온 사람들이라면 쉽게 느낄 수 있다. 나는 정말로 명확한 색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굳이 이 자리에서 나의 색을 정의하는 것이 부끄럽지만 나는 예민하고 여리면서도 우울감이 서려 있는 연두색과 같은 천성을 갖고 있다. 바꿀 수 있다면 단 하나의 심플한 색이 되어 사람의 말과 행동을 가볍게 넘기고 잊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타인의 의미를 무겁게 받아들인 만큼 나는 누군가에게 무거움을 주려하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투입(input) 대비 송출(output)이 적다. 

나는 많은 것을 내 안에 쌓아놓을 뿐 표현을 하지 않는다.


그런 나에게 글은 훌륭한 친구였다. 조용히 책을 읽고 있으면 그 행위 하나 만으로도 모든 감정의 평화가 찾아왔다. 책을 통해 지식을 쌓고 알아가는 것 보다 나는 그 행위로부터 위안을 얻었다. 글을 읽는 나의 모습, 그 시간과 공간 속에 언제나 해답이 있었다. 나의 독서엔 남는 것이 많지 않다. 많은 책을 읽고 즐긴 것 같은데 머릿속엔 그 지식이 남아있지 않고 일종의 뭉쳐진 취향으로만 애매하게 남아있다.


취향이라는 것은 설명할 수가 없다. 그냥 살아가면서 문득문득 피어날 뿐,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지식보다는 취향의 독서를 한 나이기에 나는 내 유일한 의미있는 행위를 타인에게 현학적으로 자랑할 수도 없다. 사람들은 내가 독서를 많이하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그냥 사람들은 나를 잘 알지 못한다. 



잘 살아가다가 갑자기 알 수 없는 이유로 지쳐버렸다. 아슬아슬한 모든 관계 위에서 잘해보려고 노력하는 모든 행위가 허상같이 느껴진다. 나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홀로 고요하게 살아가는 것을 더 꿈꾸지 않았던가. 인생을 다시 한번 살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처절한 고독감을 마주하더도 내 몸뚱이 한 개만 책임지면 되는 혼자의 삶을 꿈꿔보게 된다. 도망가고 싶고 도피하고 싶어도 이제는 소설의 낱장이 된 이 모든 시나리오를 이제는 마음 속에 품을 수 밖에없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딸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철저한 일개미로 구분된 내 삶에 탈출구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분 단위의 촘촘한 일상에 개인적인 일탈은 언감생신이다. 나는 지금 누군가에게 빚을 지고 사는 것 같은 이 모든 조밀한 시간들을 다 집어던지고 싶다.


알 수 없는 곳으로 가면 알 수 없는 인생이 펼쳐질까?


너무나 당연한 곳에서 당연한 일상을 살고 있는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가능한 변수들의 조합일 뿐 새로운 것은 없다. 새로운 것이 없는 안정적인 일상이 더 좋은 거라고 혹자는 말하지만, 새로운 것들을 경험해 보지못한 자들의 일종의 합리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새로운 삶은 두렵지만 나를 설레이게 한다.


아이를 낳기 직전 써 놓았던 작업 노트를 발견했다. 항상 새로운 창작에 매진했던 내 삶의 강한 힘줄이 오롯하게 만져졌다. 새로운 시도와 수많은 아이디어 노트, 그리고 스크래핑은 더 새로운 생각을 가져다 주었고, 얼추 그 작업노트 마저도 하나의 창작물같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기록이었다. 행복했던 것 같다. 그 새로운 삶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보아서 그런가? 나는 힘들때마다 중독된 사람처럼 그 순간으로 멍하게 돌아간다. 제발 단순해지고 싶다. 나의 작업 노트를 한장의 종이로 여기고 무신경하게 이리저리 뒤적거리는 나의 작은 딸의 순간처럼 나도 단순해지고 싶다. 의미부여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요즘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다시 읽어보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이 공간에서 중년의 나이에 마주한 헤르만 헤세의 매우 예민한 필체를 다시한번 기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데미안이 가장 예민하고 불안한 인생의 시기에 읽으면 가장 좋은 책이라고 했고,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그 시기를 사춘기라 칭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헤르만 헤세를 읽어야 할 것 같았다.

사춘기의 질풍노도는 지금과 비교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이 격동의 배에서 내리면 이제 젊음이 사라진 어떤 낯선 사막에 표류할 것을 알고 있다. 헤르만 헤세가 지금의 나를 구원해주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강해지기 위해 불필요한 노력을 하곤 한다.

하지만 때때로 일이 흘러가는 대로

놓아두는 편이 좋을 때도 있다.


- 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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