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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준 Jan 29. 2023

과학과 종교의 상관관계

신 그리고 과학 1

    해당 글은 원고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수정되고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


    과학은 하나님을 믿고, 또 그의 천지창조를 믿는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가장 외면하고 싶은 주제일지도 모른다. 내게 있어서도 과학은 나의 내재적 신앙과 외적 세상 사이의 비틀림을 처음으로 만든 문제였다. 과학을 배우면 배울수록, 새로이 알게되는 지식과 이전에 배웠던 개념들 사이에 큰 불일치가 있음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것은 나의 신앙이 처음으로 유의미한 타격과 충격을 입는 순간이었다. 내 앞을 가로막는 과학의 용건은 간단했다: ‘신은 없다. 창조는 거짓이다. 성경의 이야기는 지구에서 발견된 모든 발견들과 완벽히 모순된다.’


    위 논리는 과학과 지성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당연한 사실로 여겨진다. 진화론자의 필독서라 여겨지는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의 저자, 리차드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이라는 책을 통해 “종교적인 신념을 품고 있다면 지성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패트릭 글린(Patrick Glynn)이라는 학자도 어릴적에 비슷한 이유로 무신론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는 그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하고많은 곳 중 가톨릭 초등학교에서 다윈의 진화론을 배우면서 나는 일찍부터 회의론을 받아들였다. 다윈의 이론이 옳든지 창세기의 창조 기사가 옳든지 둘 중 하나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 다 옳을 수는 없었다. 나는 수업 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나 가여운 수녀 선생님에게 그렇게 대놓고 말했다. 유년기 독실한 종교적 신앙과 삶에서 멀어져 점점 더 세속적이고 냉철한 모습으로 변해 간 내 기나긴 방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현대 사회의 보편적인 사회인식은 사람들을 양자택일의 구도로 몰아간다. 과학과 이성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신앙을 택할 것인지 결정하라는 것이다. 이 선택의 갈림길에서 많은 이들은 전자를 택한다. 양자택일의 구도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신을 믿는 것은 비과학적이고 비상식적인 행동이다’라는 논지를 뿌리 삼고는 더 지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 되겠다는 이유로 신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신앙을 택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똑같은 문제로 인해 신앙의 오류를 범하는 이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신을 믿으면서도 동시에 그들이 믿는 것들이 비과학적인 것에 더 가깝다는 통념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창조라느니 부활이라느니 하는 이야기가 과학과 이성이 주류인 사회에서 평상시에 나눌 주제는 아니라고 여긴다. 기독교적 측면에서 말하자면, 하나님을 믿지만 그의 창조가 교회 건물에서만 통한다 느끼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종교가 있던지 없던지간에 ‘과학과 신앙 중 단 하나만을 선택하라’라는 구도 자체에 오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러한 통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과학과 종교 그 둘 가운데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거나 크리스천이 되려면 과학에 맞서 싸울 각오를 해야 한다는 등의 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통념과는 달리 수 많은 과학자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그들이 하는 일 사이에서 아무런 갈등을 느끼고 있지 않고 있으며, 최근 그 숫자는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내가 무신론과 유신론을 논하기 위해 가장 먼저 ‘과학’을 꺼낸 이유는 이것이 그 어떤 주제보다 가장 오만과 편견이 많은 영역이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러한 것들을 조금씩 풀어나갈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신이 없다는 근거로 가장 흔하게 사용된 ‘과학’을 통해 나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신이 존재한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음을 설명할 것이다.


    과학과 종교의 충돌이라는 개념은 보편적으로 중세시대의 계몽주의적 사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중세시대 가톨릭 교회의 탄압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종교적 의식이 과학의 발전을 억제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리고는 그 이후에 나타난 여러 과학자들을 칭송하면서 그들을 통해 사회가 이성적 탐구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고, 결론적으로 신이라는 비이성적인 존재로부터 우리가 해방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14세기부터 16세기의 과학혁명 시기 당시에 활동했던 위대한 과학자들은 전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과학적 사고방식과 원리들을 발견했다. 북아일렌드 벨패스트 퀸즈 대학교의 지구과학 교수 데이비드 N. 리빙스턴(David N. Livingstone)은 기독교와 과학의 관계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와 과학이 끊임없이 서로 반목하는 관계라는 개념은 역사적 기록을 심히 왜곡한 것이다. 영국의 위대한 화학자 로버트 보일(Robert Boyle)은 누구보다 과학자들이 자신의 일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다고 믿었다.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조사하는 사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과학이 인간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의 물리학과 수학을 있게 해준 아이작 뉴턴도 무신론자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말을 남겼다: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것은 무신론을 공언하는 것이며, 우상숭배를 실천하는 것이다. 무신론은 너무나 비상식적이며 인류에게 해롭기에 그것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결코 많지 않다.” 이외에도 요하네스 케플러, 프랜시스 베이컨, 르네 데카르트까지도 모두 기독교 신자였다. 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혹은 그들이 발견하고 발명한 것들이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와는 별개로,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그 모든 것들을 발견하였다. 즉, 그들에게 신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존재였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과학은 신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통로가 아닌 신을 더 알고 그와 더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해 통로로 여겼다.


    그러나, 이런 역사 이야기를 하다보면 사람들은 과거의 이야기는 접어두고 현재의 이야기를 하자고 말한다. 그러면서 대게 이런식의 반응을 보인다: '중세시대로부터 400년도 더 지난 지금의 과학은 그 400년이라는 시간동안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동안 발견된 모든 과학법칙과 고고학 유물을 중세 과학자들이 보았더라면, 그들은 분명 그들이 믿던 신의 존재를 의심할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동의한다는듯이 리차드 도킨스는 미국국립과학아카데미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에 소속된 학자들 가운데 고작 7퍼센트만이 인격적인 신을 믿는다는 1998년의 연구논문을 제시하였다. 해당 논문에 따르면 지성적이고 이성적이며 과학적인 사고를 할수록 신에 대한 믿음이 줄어들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떠한 통계자료를 보던지 간에 그것을 해석할 때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도킨스의 해석에는 크게 두 가지 오류가 있다. 첫째, NAS 회원들이 받은 질문은 인간과 인격적으로 소통하는 신을 믿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에 따르면 초월적인 무언가가 우주를 창조했다는 생각을 품는 정도로는 위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질문 자체부터가 지극히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신앙을 가진 학자들을 찾는데 적합하게 설계되었던 것이다. 한결 보편적인 수준에서 우주를 만든 지적설계자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은 위 문항을 통해 제외될 수밖에 없다.


    둘째, 도킨스는 NAS에서의 데이터를 과학적인 사고와 무신론 사이에 분명한 인과관계가 있다는 방향으로 해석하지만, 그의 해석과는 달리 우리는 그들이 어떤 이유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지는 알 수도 없고 증명될 수도 없다. 신학자이면서 옥스퍼드에서 생물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앨리스터 맥그라스는 알고 지내는 과학자들 가운데 신앙이 없는 이들은 대부분 과학적인 근거보다는 다른 이유에서 무신론적인 입장을 보인다고 말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신을 거부하게 된 근거는 과학적인 결론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경험 혹은 사회적인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신이 없다고 믿는 과학자들이라면 모두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머리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는 자신의 생각에 동의할 거라 확신했던 도킨스의 기대와는 달리, 하버드 대학의 교수로 있었던 진화생물학자이자 무신론자이기도 했던 스티븐 제이 굴드 마저 앞서 언급한 NAS에서의 연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이 기독교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는 과학계에서 존경받는 동료들 가운데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음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절반에 이르는 동료들이 엄청나게 어리석거나, 아니면 다윈주의 과학이 무신론과 사이좋게 지내듯 전통적인 종교들의 믿음과도 아무 탈 없이 공존할 수 있거나, 둘 중 하나다."

 

    수학자 윌리엄 뎀스키와 생화학자 마이클 베히는 우주와 생물학 세계에 이성적인 설계자(Intelligent Designer)가 있다고 추론한다. 이는 독단적인 맹신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관점에서, 이성적인 창조주가 있어야 한다는 증거를 바탕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하버드 대학을 진학하고 조지 워싱틴 대학교의 공산사회 정책 연구소 차장 겸 상임 연구원으로 일을 했던 페트릭 글린은 이전에 품었던 회의론으로부터 다시 회심하고, 그의 책에서 유신론적인 결론을 맺었다.


"오늘날 구체적인 데이터는 '하나님 가설'쪽을 강하게 지지하고 있다 … 거기에 반대하고 싶어도 내세울 만하거나 시험 가능한 이론이 전혀 없다. 난무하는 과학적 상상 속에서 만들어 낸, 보이지 않는 우주들에 대한 억측만이 있을 뿐이다. … 한 가지 아이러니는 이것이다. 가장 진보된 20세기 과학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우주상은, 코페르니쿠스 이래로 과학이 제시한 그 어떤 것보다 창세기에 나타난 모습과 본질상 더 가깝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모든 팩트가 왜 사람들은 알려지지 않는 것인가? 나는 이 문제를 크게 두 가지 이유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 정말로 이 사실을 모를수밖에 없었던 환경속에서 살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이 사실을 그저 알고싶지 않았거나.


    전자에 속한 삶을 살아온 이들을 향해서 비판하고픈 생각은 없다. 다만 그러한 환경을 조성한 현대 미디어와 교육 시스템에 대해서는 강하게 지적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지금의 미디어는 진화론을 가르치는 학교교육, 줄기세포연구, 인공수정과 그 밖에 의학과 과학의 여러 분야들을 두고 세상 사람들과 신앙인들이 맹렬하게 싸우고 있다고 떠들어 대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크리스천 스미스는 그의 책에서 19세기 말, 과학자들과 교육계의 지도자들이 교육기관에 미치는 교회의 통제력을 약화시키고 스스로의 문화적인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과학과 종교 사이의 갈등을 부각시키는 모델을 과장했다고 지적하였다. 이 과장된 모델에 의해 편향된 시각을 주입받은 사람들 사이에는 과학과 종교를 주인공과 그의 적수로 보는 이미지가 자연스래 생겨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윌리엄 레인 크레그 박사의 말을 인용하면서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발견되는 선입견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해보려 한다. "논리학자들에게는 소위 '최상의 설명으로 추론한다'는 지론이 있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설명해야 할 데이터 뭉치가 있을 때 우리는 그 데이터에 대한 다양한 설명과 가능성이 있는 대안을 모두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은 것 중에서 어떤 설명이 관찰된 데이터를 가장 잘 설명할지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부 회의론자들은 초자연적 설명은 대안이 될 만한 목록에 아예 넣지도 않으려 합니다. 따라서 어떤 사건이 자연적으로 설명되지 않으면 무지 상태를 그대로 답보하게 됩니다. 그것은 편견입니다. 무신론이 입증되지 않는 한, 초자연적 설명들을 대안이 될만한 목록에서 제외시키는 데 정당한 근거는 없습니다. 초자연적 설명을 목록에 포함시키고 나서, 개방적이고 정직한 탐구자의 자세로 어느 것이 주어진 사건에 대한 최상의 설명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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