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는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한 고양이였다. 오밀조밀한 노란 눈으로 창 밖에서 나를 올려다보면 나는 서둘러 츄르를 들고나갔지만 루이는 츄르를 대번에 먹는 법이 없었다. 츄르가 먹고 싶어서 나를 올려다본 거면서 꼭 후다닥 도망갔다가 조심스럽게 다가오곤 했다. 어떤 때는 가게의 통유리 앞을 휘적휘적 걸으며 나에게 츄르를 달라는 눈치를 줬다. 문을 열면 깜짝 놀라서 일단 차 밑에 숨고서야 츄르를 먹으러 나왔다.
처음 매장에 들어올 때도 그런 식이었다. 한 발 올려놓았다가, 다시 입간판 아래로 숨었다가, 두 발 올려놓았다가, 저 멀리 도망갔다가. 결국 네 발을 모두 매장에 들인 것은 한참 뒤였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쏘이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너무 오래 있었다 싶으면 홀연히 사라졌다. 그렇게 조심성 많고 소심한 고양이가 어쩌다가 차에 치인 것일까.
여기서 장사한 지 반년도 되지 않았는데 루이가 죽은 지점이 너무 좁아서 지나가지 못하다가 옆면을 긁는 차량을 몇 번이나 보았는지 모른다. 나도 운전해서 여러 번 지나간 길이지만 절대 속도를 낼 수 없는 길목인데.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루이가 죽기 전 날, 어찌나 피곤해하는지 꾸벅꾸벅 조느라 사람이 다가가도 모르더라, 라는 말을 누군가 했다. 루이는 너무 피곤했던 걸까.
어제는 비가 와서 루이가 죽은 자리에 피가 고였다. 루이는 이 세상을 사는 기분이 어땠을까. 길고양이의 운명이라는 것. 그냥 운명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마음이 내려앉는다. 주차 때문에 매일 서로 신경전을 벌이는 각 가게의 주인들이 나와서 루이가 얼마나 불쌍한 고양이였는지, 앞으로 루이의 새끼들은 어떻게 할 것인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고 보면 루이의 끼니를 챙기는 사람이 많았다. 눈에 익은 사람도 있었고, 우리 손님들도 있었고, 처음 보지만 익숙한 듯 밥그릇을 두고 떠나는 이도 있었다. 그래도 행복한 순간들은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슬퍼서 견디기가 어렵다.
엄마는 내가 쉬는 날 죽은 루이가 발견돼서 다행이라고 했다. 루이는 아주 처참하게 죽었다고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화요일부터 루이 생각에 아주목이 막힌다. 어쩌다 이름까지 지어주는 사이가 되었을까. 내가 처음 만든 가게 메뉴인 루이보스티와 한라봉에서 앞 글자를 따서 루이라 불렀다. 루이의 털 색깔이 꼭 우려낸 루이보스티 같아서 아무렇게나 붙인 것인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이름도 정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가게에서는 루이로 통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각각 다르게 불렸다. 그리고 사람들은 각각 다르게 후회했다.
루이는 다섯 마리 새끼들을 꽁꽁 숨겨 뒀었다. 엄마가 죽은 월요일에는 조용하더니 화요일에는 다 같이 나와서 삐약거린다. 배가 고픈지 사람을 무서워하지도 않는다. 배가 불렀다 홀쭉해져서 돌아다니길래 새끼를 낳은 줄은 알았는데 그 모습은 처음 본다. 얼굴들은 루이를 닮았지만 털이 삼색이다. 어슬렁 거리던 동네 대장 젖소 고양이가 아빠인가 보다. 괜히 원망스럽다. 계속 곱씹는다.
루이의 새끼들은 루이를 가장 지극정성으로 돌보던 사람이 병원에 입원시켰다. 나도 괜한 책임감이 생겨 두 마리 분의 병원비는 내가 내고, 입양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루이의 시체도 치웠고, 아기 고양이들도 잘 구조했는데 마음이 개운치 못하고 욕지기만 남는다. 꼭 루이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의식을 치러야 끝날 것 같건만 무엇을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고. 삼일 간 루이의 죽음과 루이의 노란 눈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무슨 글이라도 쓰지 않으면 떨쳐내기 힘들 것 같아 루이에 대한 글을 적는다.
다소곳이 앉아서 노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던 고양이야, 안녕. 그곳에서는 안전하고 안심하는 하루하루를 보내길. 새끼들은 어떻게든 안전하게 살도록 노력해볼게. 그런데 지금도 네가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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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2020년 6월에 적은 글로 아기 고양이 다섯 마리는 병원에서 범백에 걸린 것으로 판명됐고 일주일 새 세 마리가 죽었다. 루이도 아마 범백에 걸려서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살아남은 두 마리는 한 달간 우리 집에서 우리 집 고양이의 구박을 받고 지내다 좋은 분을 만나서 자매끼리 같은 집에서 산다. 두 마리 입원비로 내가 100만 원, 세 마리 입원비로 캣맘 분이 150만 원을 지불한 여파로 되도록이면 동네 고양이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빌라의 센서등이 켜지면 신경이 쓰이는 채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