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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민욱 Feb 18. 2021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글을 쓴다.

"할아버지는 지금 누가 제일 보고 싶어?"


"할머니가 제일 보고 싶구나."


나의 할아버지는 이런 분이시다. 생사를 가르는 큰 수술 이후 의식을 차렸을 때 막내딸, 큰아들, 작은 아들, 큰며느리 , 손주, 손녀들이 다 있을 때 가장 먼저 사랑하는 아내인 할머니를 찾으시는 분.


2019년 가을 할아버지는 췌장암 판결을 받으셨다. 한평생을 건강하게 사셔서 100세까지는 거뜬하게 사실 줄 알았던 우리 할아버지, 그러신 분이 암에 걸리실 줄 상상도 못 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할아버지의 인생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의 아버지(증조할아버지)는 일을 하시지 않고 술을 마시는데 바쁘셨다. 그렇기에 할아버지는 술값을 청구하는 사람들의 독촉에 시달리며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


그 뒤 군대를 갔다 와선 어린 나이에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심에 따라 어머니와 7남매를 먹여 살여야 하는 가장이 되었다고 한다.


할 줄 아는 것이 농사일과 힘쓰는 일 밖에 없었기에 할아버지는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머슴처럼 일해 가족을 홀로 먹여 살리셨다. 고모할머니들에겐 할아버지는 오빠가 아닌 한 명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그러던 중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잘 살던 집안에서 귀하게 큰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는 그런 할머니와 결혼하고 많은 고생을 시켰다고 너무 미안하다고 회상하셨다.


그러고 할아버지는 슬하에 5자녀를 두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할 줄 아는 것이 궂은일 밖에 없지만 자녀들 만큼은 이런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아 모든 궂은일은 혼자서 하시고 어린 자녀들은 공부에만 몰두하도록 하셨다.


먹을 것이 매우 귀하던 그 시절에 할아버지는 홀로 5자녀를 교육시켜 서울대, 고려대, 경희대 한의대, 교대 등 모두를 대학 졸업까지 키워내셨다.


할아버지는 한 평생 월 200만 원 이상을 벌어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자신을 위해서는 그 좋아하시는 단 음식을 사드신 적이 없다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자식들이 사탕을 먹을 때 홀로 설탕을 먹으시던 그런 분이셨다.


할아버지는 가난하더라도 항상 정신은 경건했으며, 남에게 도움을 준 적은 많지만, 단 한 번도 남에게 빚을 지어본 적이 없는 고고한 선비, 위대한 정신이셨다.



이런 인생을 듣는 나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나는 유복한 가정에 태어나 크게 궂은일을 해본 적이 없다. 나에게 할아버지는 그저 운동을 좋아하셔서 몸이 튼튼하고 건강하신 분이셨다. 할아버지의 악력과 힘은 고등학생 때까지의 나를 능가하셨는데, 그 이유에 대해선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이 이야기들을 직접 들으니 비로소 실감이 났다. 할아버지의 두껍고 거친 손은 할아버지의 삶의 고생을 뚜렷하게 보여줬다. 나와 비슷한 나이에 가정의 목숨을 짊어져야 했던 그 무게감은 상상도 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스스로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할아버지와 추억이 많은 편이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바쁘셔서 할아버지와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나는 일은 할아버지의 자전거에 내 발이 끼어 다쳤을 때이다.


할아버지는 자전거를 자동차라고 부르시며 애용하셨다. 자전거 하나만 있으시면 어디든지 가실 수 있으셨다.

할아버지는 어린 나를 뒤에 태우고 자주 자전거를 타셨는데 어느 날 내가 발을 굴러가는 바퀴에 넣어 다리를 심하게 다친 적이 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다친 나를 바라보며 엄청 걱정을 많이 하시고 바로 나를 업고 자신은 생전 가지 않는 병원에 뛰어가시던 할아버지. 그의 등 속의 포근함과 안정감은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다.


할아버지는 나의 어린 시절부터 클 때까지 내가 아플 때마다 나를 돌봐주시던 분이셨다. 신종플루에 걸렸을 때도 눈을 뜨고 나면 항상 할아버지가 내 곁에 있으셨다. 운전을 하시지 못해 항상 자전거와 대중교통을 이용하시면서 멀리 있는 나를 간호하러 언제든지 오셨다. 다리를 다쳐 전신마취를 하고 깨어났을 때, 뇌수막염에 걸려 자다가 깨어났을 때 언제나 할아버지는 내 곁에서 내가 눈을 뜰 때마다 거기에 계셨다.



그런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는 할아버지가 아프실 때 2주에 한 번꼴 정도밖에 찾아가지 않았다. 시간이 있었지만 피곤하다고 할 일이 많다는 핑계로 하루하루가 마지막일 수 있는 할아버지를 찾아뵙지 않았다.


그리고 항상 만날 때마다 긴 시간을 함께하지 못하고, 다음에 또 올게요 라는 무책임한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할아버지께 우리를 키워 주셔서, 우리를 위해 할아버지의 인생을 헌신해 주셔서, 할아버지의 그 거친 손 덕분에 나는 이렇게 고운 손을 가질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말을 부끄럽다는 이유로 '다음에 올 땐 꼭 말해야지' 며 계속 계속 뒤로 미뤘다.



그런데 다음은 이전과는 달랐다.



할아버지의 암 전이가 너무 진행되어 대장을 아예 못쓰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장 속 노폐물이 빠져나와 온 장기가 병균으로 뒤덮인 상태에 놓이게 되셨다. 의사 선생님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하셨다. 마음이 철컹했다. 다음이라는 말이 이렇게 무책임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나에겐 내일은 너무 당연했지만, 할아버지에게는 그러지 못했다. 코로나 때문에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도 못하고 이대로 감사하단 말도 전하지 못하고 보낼까 봐 너무 가슴이 아팠다. 마지막 소원이었다. 할아버지가 여느 때처럼 모두가 불가능하다 외칠 때 또다시 의식을 차리시기를. 진심을 전할 수 있기를.



기적이 일어났다. 할아버지의 수술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 비록 암덩어리 위에 바늘을 꿰매었지만 할아버지는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동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민욱이냐?"


할아버지를 찾아뵙더니 어느 때와 같이 나를 부르셨다.


"바쁜데 뭐하러 찾아와."


할아버지는 여느 때와 같이 저 말을 하셨다. 주변에 사람이 많아 부끄럽던 나는 그저 할아버지에게 고맙다고만 했다. 구체적인 감사를 전하지 못하고 그저 고맙다고만 했다.

 아마 할아버지는 의식을 차려서 고맙다고 해석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 고맙다는 말은 할아버지의 인생과 삶에 대한 감사였다.


"수요일에 다시 올게요."


나는 이 말을 남기고 그를 두고 떠났다. 그리고 수요일에 가지 않았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나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안일했다. 할아버지가 다시 건강해질 거라고 할아버지는 항상 강하신 분이셨으니깐 아픈 와중에도 항상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할 정도로 항상 몸과 마음을 경건히 하실 정도로 강하신 분이니 다시 회복하실 거야 라는 핑계를 대고 같은 실수를 번복했다.



그리고 2주일 정도 지나고 다시 찾아뵈었다. 이번에는 꼭 구체적인 감사를 전하기 위해 할아버지를 독대했다. 할아버지의 손을 잡는데 왠지 오늘이 마지막일 것 같았다. 그 손을 잡는데, 온몸의 살이 다 빠져 말랐는데 그 거친 손만은 어김없이 두꺼웠다. 눈물이 났다. 그저 눈물이 났다. 이 손으로 11 가정을 먹이셨던, 어린 시절 아버지 때문에 빚 독촉을 받고, 그 아버지마저 여위어 홀로 생활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던 청년 시절의 할아버지를 떠올리니 눈물 밖에 나지 않았다.



그런 눈물을 머금고 할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할아버지의 삶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고, 할아버지의 삶이 있었기에 11 가정과 그 슬하의 자녀들이 지금 모습으로 있을 수 있었다고, 할아버지의 삶은 죽음이라는 절망을 초월하여 그 가치를 몸소 보여주셨다고.



그리고 이 말을 전했다. 할아버지 사랑한다고, 존경한다고. 할아버지가 생전에 가장 중요시하던 가치인 가족을 내가 지켜나가겠다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할머니도 남아있는 우리가 잘 모시겠다고, 회복하면 좋겠지만 혹시 떠나신다면 너무 걱정하지 말고 편한 마음으로 떠나셔도 된다고.



그러자 할아버지는 다리를 움직이시며 소리를 내셨다. 내가 한 말을 할아버지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움직임은 감사의 인사를 제대로 전하지 못한 나에게 할아버지가 주시는 용서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다음 날 할아버지는 소천하셨다.



할아버지는 마지막까지 사회에 도움이 되고자 시신 기증을 하셨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마지막까지도 나에게 가르침을 주셨는데 , 할아버지의 마지막 가르침은 '죽음'이라는 것이었다. 인간은 죽는다. 이 말을 절실히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다시는 뵙지 못하고 아무리 죽은 뒤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가르침은 그것을 뛰어넘어 삶이라는 것이 죽음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장례를 위해 많은 이들이 찾아오고 화한을 보냈다. 이들은 할아버지가 그 거친 손을 가지고 키워온 자녀들의 지인들과 그 거친 손에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그 위대한 정신의 자녀인 우리가 그의 희생과 헌신 덕분에 이 땅 위에 살아가는 기적을 낳으셨다.



할아버지는 내가 살아오는 동안 봐온 모든 사람들을 통틀어 가장 존경하는 분이셨다. 그 누구보다 강했고, 한 여자를 6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누구보다 아끼시고, 사랑하셨던 분이시며, 그 손을 잡으면 스스로 겸손해지게 되는 그런 분이셨다. 그의 마지막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다. 글을 씀으로써 할아버지의 삶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이다.  이제 다시는 뵐 수없는 나의 영웅,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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