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여행기
몇주 전 부터 경주에 이끌렸다. 누가 보낸 '계시"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종종 특정한 것으로부터의 신호를 잘 알아차리는 편이다. 이번에는 그것이 경주라는 장소였다. 카페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대화 주제도 경주 여행이었고, 서점에서 우연히 집어든 책의 한 편이 경주의 역사에 대한 내용이었으며, 여행 어플에 뜬 팝업창도 경주 숙박 할인권이었다. 경주를 가라는 신호라고 느껴졌고, 안가면 안될 것 같은 기분까지 들기 시작했다. 사실 독립적인 사건들의 공통점을 연결지어 일종의 계시라고 여긴 것일 수도 있겠지만, 하필이면 그런 공통점을 찾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칼 융도 이런 사건을 두고 우연한 가능성 이상의 뭔가가 작용하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어떤 정신적 개념을 사유하고 있는데 그와 관련된 현실적인 사건이 일어나면서 명확하게 이해되는 순간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에 의해 도움을 받는 것 같을 때 바로 동시성을 느낀다고 한다. 그의 주장에 한수저 올려 내가 경험한 것도 필히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일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한 이유를 명분으로 삼으며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영화 "경주"를 봤다. 배우 박해일님을 좋아해서 봐야할 작품 목록에 넣어뒀었는데 어쩐지 손이 잘 가지 않았다. 경주를 여행하기로 마음 먹은 참에 사전 답사를 하듯 영화를 재생했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에 예고편이나 감상평을 미리 보지 않는다. 작품을 본격적으로 감상할 때, 그것들이 나만의 감상을 조작하는 느낌이 싫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이 영화를 보는 것이 그 장소에 대한 온전한 감상을 혹여 헤칠까 조금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영화는 경주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자극시켰고, 여행하는 동안 그 호기심에 대한 답을 찾으며 장소를 온전히 느끼는데에 도움이 됐다.
영화에 대한 대략적인 줄거리를 설명하자면, 친한 형의 장례식 참석을 위해 경주를 찾은 최현(배우 박해일)은 과거에 경주를 여행하며 보았던 춘화의 기억을 더듬으며 어느 찻집으로 향한다. 찻집 주인인 공윤희(배우 신민아)를 더불어 여러 사람들을 마주하고, 경주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잔잔하게 그려낸 영화다. 영화 내에서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음과 연관된 사연을 가지고 있다. 경주는 이미 죽고 사라진 자들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인데, 그런 의미에서 장소적 배경은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아내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생각해 보니 초등학생때 수학여행으로 경주에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는 그저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신이 나서 떠들고 노느라 장소를 느낄 겨를이 없었다. 또한 당시에는 죽음을 진실로 이해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었기 때문에(지금도 ‘진실로’ 이해할 순 없지만) 기억에 남는 감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영화를 더불어 과거를 회상하며 기대감을 안은 채 아침 일찍, 경주로 향하는 KTX에 올랐다.
2편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