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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아 Aug 23. 2022

비오는 날의 규칙

그녀의 우산 접기

장마가 시작됐다. 지하철역이 침수되고, 강이 불어나 도로가 통제될 정도로 비가 무척이나 쏟아진다. 이런 날에도 외출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집을 나서기도 전부터 피곤했지만, 뭐 어쩔 수 있겠나. 한숨을 쉬며 장화를 발에 구겨 넣고 이동을 위해 버스를 기다렸다.



 세상이 점점 더 흉흉해지는 것 같다. 가족 동반자살, 총기난사사건, 보이스피싱, 폭행, 자연재해 등등. 뉴스를 시청하는 시간 자체가 이전보다 늘어났기 때문에 접하는 사건사고의 수가 많아져서 그렇게 느끼는 착각임을 알면서도, 그것들이 주는 충격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로 심각한 사건, 사고, 범죄 등을 접할 때마다 세상은 혼돈의 카오스 속에 가라앉아버리는 것 같다. 그 혼란 속에서 커지는 불안감은 불현듯 일상생활을 잡아먹기도 한다.



 그렇게 오늘도 불안감을 잠재우지 못한 채 버스에 올라탔다. 비에 젖은 노면에 혹여 버스가 미끄러지진 않을까, 내가 앉은 좌석 옆으로 미끄러지는 차가 충돌해서 심하게 다치진 않을까, 들것에 실려가는 나를 비춘 화면이 뉴스에 나오진 않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을 하며 속으로 버스 아저씨의 안전운전을 필사적으로 기도했다.  



 우비를 입은 사람들, 장화를 신은 사람들, 바지를 걷어붙인 사람들, 어깨 반쪽이 젖은 사람들. 제각각 비를 피한 흔적들이 보이는 사람들로 버스는 가득 차고 있었다. 목적지로 향하는 중간쯤 갔을까, 허리가 굽은 할머니 한 분이 올라타셨다. 직접 수를 놓은 것처럼 보이는 동전지갑에서 지폐와 동전 몇 개를 꺼내 돈 통에 흘려보내고 내가 앉은 옆 좌석에 앉으셨다. 백팩의 밑동과 바지 끝단은 축축하게 젖었다. 몰아치는 비바람에 어지러워진 숨을 잠시 고르고는 손에 들고 있던 우산을 접기 시작했다.



 야무지다는 형용사가 실체로 존재한다면 바로 그 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할머니는 느긋하면서도 정성스러운 손길로 젖은 캐노피를 만지며 접힌 자국대로 하나하나 접었다. 소위 칼각이라고 하는 각도를 살려 우산을 공장 초기화 상태로 되돌려놨다. 우산이 머금고 있는 물기까지 아주 야무지게 짜고는 그대로 손에 쥐었다. 정성스럽게도 접길래 버스를 오래 타고 가시나보다 생각했지만, 할머니는 4정거장을 지나 금방 내리셨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내 일상을 잡아먹던 불안감은 느끼지 못했다. 할머니의 정교한 의식과도 같은 '우산 접기'를 보면서 그녀 삶 속의 규칙을 하나 엿본듯했다. 누구나 자신만의 규칙이 있다. 일어나서 커피를 한잔 마셔야 한다거나, 신발은 꼭 가지런히 벗어놔야 한다거나, 수건은 꼭 가로가 아닌 세로로 접어야 한다거나. 남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규칙들은 본인의 만족감과 내적 평온만을 위한 것이다. 그러한 규칙을 어기고 행하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혹은 불안을 느낄 때 그것 중 하나를 행하면서 안정을 되찾을 수도 있다. 할머니는 우산에게 부여한 규칙을 실로 정성스럽게 따르며 내면의 질서를 곧이 세웠다.



 나는 그녀를 보며 새로운 규칙 하나를 만들었다.


' 비 오는 날 타는 버스 안에서는 사람들 관찰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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